남자보다 여성들에게 더 인기 끄는 ‘군대 이야기’… 연극 ‘삼등병’ 대학로 소극장서 7월 10일까지 공연
입력 2011-07-03 18:18
“군생활이란 건 말이야, 말하자면 한 편의 연극이야. 그래서 한 번 이 군대라는 무대에 올라서면 중간에 마음대로 내려갈 수가 없지. 근데 그 연극이 좀 길다. 24개월. 영겁의 시간이지.”
‘삼등병’은 군 생활을 연극에 은유하나 극의 배경인 군대가 은유하는 건 실상 우리들의 삶이다. 그러니 ‘삶은 연극’이란 등치도 성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제각각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만 대개는 정해진 대사를 읊조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한다. 극 중 주인공 윤진원이 ‘네’ ‘알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혹은 ‘모르겠습니다’ 이외의 대사를 할 때 얻어맞는 것처럼.
연극은 국문과에 재학 중이며 대학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갓 훈련소를 마친 윤진원의 군생활을 순차적으로 따라간다. 1막에서는 병장에게 괴롭힘 당하는 이병 윤진원이, 2막에서는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난 일병 윤진원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제대를 두 달 앞둔 윤진원 병장이 등장한다. 윤진원이 시간과 지위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선한 설정 외에도 눈에 띄는 건 치밀한 연극적 구성. 가령 윤진원의 이병 시절에는 연극 ‘파수꾼’이 극중극 형식으로 보여진다. 윤진원의 선임이자 연극배우인 조태기가 윤진원과 함께 연극 연습을 하는 장면을 빌어 나타나는 것이다. 극중극으로 보여지는 연극 ‘파수꾼’은 이미 사라져 나타나지 않는 이리떼의 습격을 매일 경보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늙은 파수꾼의 이야기다. 여기서 윤진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봉변당하는 어린 파수꾼 역을 맡는다. 군대의 때를 덜 탄 윤진원과 그가 맡은 배역의 순수함이 겹쳐지며, 관객들은 극중극 ‘파수꾼’이 극의 메타포 구실을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한다. ‘군 생활은 연극’이라는 조태기의 대사와 더불어, 연극 속 세계는 서서히 관객들에게 침투된다.
‘군생활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핵심대사는 모두 세 번 되풀이된다. 극 서두에 진원을 괴롭히는 조태기의 입에서 나왔다가 중간부분에선 진원의 친구 이종문이 말하고, 마지막으로 진원 본인이 말한다. 그 때마다 대사는 다른 울림과 무게를 전하며 묵직한 깊이를 드러내는데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진 그 깊이야말로 이 연극의 미덕이다.
연극이 유머와 해학 너머로 보여주는 건 철조망 너머에 갇혀 사는 인간들의 폭력적인 억압과 절망, 그리고 변질이다. 순수는 순식간에 변질되고 인간은 체제에 쉽게 적응한다. 극이 끝날 즈음에 이르러서야 ‘삼등병’이라는 연극의 제목도 관객들에게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극의 첫 부분에 병장 조태기는 이병 윤진원에게 ‘네’ ‘아니오’ ‘그렇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외의 말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제대로 된 이등병한테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제대를 앞둔 병장 윤진원이 탈영한 후임을 상부에 보고하며 ‘네 알겠습니다’와 ‘그렇습니다’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이등병보다 더한 ‘삼등병’, 군대가 요구했던 억압의 규율을 내면 깊이 받아들인 새 인간의 탄생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군더더기를 덜어내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대사는 욕설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구어체로 쓰였다. 성기웅 연출은 작품을 설명하며 “80년대 태생의 감수성을 녹여냈다”고 했지만 나이를 떠나 전 세대가 공감할 만하다. 심각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덕에 연극에 문외한인 일반 관객이 보더라도 전혀 생경하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듯하다.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주인공 윤진원 역에 김태훈이 캐스팅됐는데 프로필이 아직 백지인 신인이다. 이밖에 박혁민 김성현 이현균 출연. 군대 이야기를 다룬 것치고 예매자 비율은 여성이 70% 이상 압도적으로 높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