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에 관한 오해·진실 밝히다… 평론가 장석주가 쓴 ‘이상과 모던 뽀이들’

입력 2011-07-01 17:51


모던 보이 이상(李箱·1910∼37). 지상에서 딱 26년 8개월을 살다간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은 소설 ‘날개’의 첫 문장에 이렇게 적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친구인 척추 장애인 화가 구본웅이 1935년 3월 그린 ‘우인의 초상’이란 그림에 상아파이프를 문 채 봉두난발의 머리와 텁수룩한 구레나룻을 기른 퇴폐와 패륜의 표상으로 새겨져 있다. 파이프는 이상의 것이 아니라 구본웅의 것이었다. 이상은 가끔 담배를 피웠으나 평상시에는 거의 흡연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비흡연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 구본웅의 그림과 더불어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라는 ‘날개’의 한 구절을 통해 그는 헤비 스모커로 인식되었다. 잘못된 인식은 모독이나 마찬가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56·아래 오른쪽 사진)의 ‘이상과 모던 뽀이들’(현암사)은 이상에게 씌워진 이러한 모독을 벗겨내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힘껏 탈주하려 했던 그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장석주는 이상에 관한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적 서술을 시도한다.

1935년 가을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스무 살의 문학청년 서정주와 몇 명의 청년들이 이상의 집에 들이닥친다. 서정주와 함형수, 오장환, 이성범 등 네 명이다. 이상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뒷골목에 변동림과 막 신혼살림을 차린 뒤였다. “그들은 무릎을 맞대고 두세 시간 정도 문학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이상은 별다른 말없이 ‘네에, 네, 네…’하거나 ‘준데, 괜찮아, 준데 괜찮아, 준데 괜찮아…’라며 동생뻘인 청년들을 상대했다. 서정주의 귀에 ‘준데’라는 발음이 특이하게 들렸다. ‘좋은데’라는 말을 이상은 그렇게 독특하게 발음했다.”(57쪽)

“산보나 나갑시다”라며 이들을 끌고 나가 새벽까지 술추렴을 하던 이상의 기이한 행동은 다시 서정주에게 목격된다. 소공동의 한 선술집에 들렀을 때 이상은 느닷없이 서른댓쯤 되어 보이는 주모의 검정 스웨터 앞가슴에 달린 단추를 누르기 시작한다. 그 행동을 두고 미당은 “이런 SOS의 초인종의 진땀나는 누름, 거기 뚫어지는 한정 없이 휑한 구멍”이라고 회고한 바 있는데 저자는 “서정주가 SOS의 누름이라고 했던 이 행위는 탈아에의 무의식적인 갈망을 드러낸다”면서 “이 탈주의 현실적 행위로 선택된 것이 동경행”이라고 쓰고 있다.

어릴 때 백부에게 입양된 후 21살 때 본가로 돌아온 이상에게 아버지는 둘이었지만 사실은 그에게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상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심리적 고아라는 정체성에 고정될 수밖에 없고, 불가피하게 입양아적 분열증세 상태에 놓인다. 정신을 좀 먹는 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진짜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61쪽)

진짜 아버지를 찾아 동경행을 감행한 이상은 거기서 무국적자로 떠돌다가 체포되어 일본 경찰서에 구금되고 결국 폐결핵의 급격한 악화로 죽음을 맞는다.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후 혼자 남겨진 신여성 변동림도 화려한 남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변동림의 오빠인 변동욱이 소공동에서 운영하던 카페 낙랑파라를 소설가 박태원 등과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상은 당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수필가로 막 등단한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은 변동림의 문학에 대한 이해, 교양주의, 이화여전 출신이라는 아우라에 끌렸다. 36년 6월 친구들도 부르지 않고 둘 만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그러나 10개월도 안돼 파탄을 맞는다. 37년 4월 변동림은 이상의 위독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도쿄로 건너가지만 이상은 아내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사인은 결핵성 매독이었다. 변동림은 1930년대의 걸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이상과 함께 남다르게 살고 싶었으나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동경에 있던 김소운이 전보를 받고 동경제국대학부속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화가 길진섭은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뜨고 있었다. 영안실에는 변동림과 예닐곱 명이 둘러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굳은 석고를 떼어내자 수염 몇 가닥이 뽑혀 나왔다. 이상의 시신은 화장터로 운구되었고 유골함을 안고 경성으로 돌아온 변동림은 며칠 뒤 미아리 공동묘지에 유골을 안장시킨 뒤 비목에 묘주 변동림이라고 명기하는 것으로 이상과의 인연을 끝맺는다. 변동림의 애도 속에 모던 보이 이상의 짧은 인생은 막을 내렸지만 변동림은 44년 5월 화가 김환기와 재혼 직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한 뒤 프랑스 유학을 거쳐 64년 뉴욕에 정착한다. 변동림의 근대 실험은 이상 사후 67년째인 2004년 2월 그가 뉴욕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자 장석주는 “이상과 보던 보이들이 겪은 악몽과 끔찍한 불행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책이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탐구와 보고서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