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입력 2011-07-01 17:20
기독교적 기술윤리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다. 정보통신, 우주공학, 생명공학, 친환경 등 많은 분야에 걸친 고도의 기술이 현대인의 삶과 사회 전 영역을 지배하며 계속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제도나 문화적인 태도와 가치관 등에 기술의 영향력이 깊숙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술이 갖는 의미는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어 적잖이 혼란스럽다. 한편에선 기술이 인류에게 무한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선 인간을 획일화하고 비인간화해 결국 속박과 퇴보, 파괴와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고도 한다. 선뜻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혼재해 있는 것이 바로 기술에 대한 이해다. 기술은 항상 양면성이 있다. 선과 악, 축복과 저주가 공존한다.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기술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은 항상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이 기술을 만들거나 사용하게 될 때엔 필연적으로 가치 평가를 회피할 수 없다. 기술은 선과 악을 낳는다. 일례로 화석에너지 기술은 공장을 돌려 다량의 제품을 생산하고, 교통운송 산업을 촉진시켜 인류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반면 부작용으로 갖은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를 초래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모든 행동은 윤리적인 숙고와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사회적 책임을 부단히 요청한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샬롬(shalom)의 기술’을 지지한다. 그는 기술을 사람들이 하나님, 인간 상호간 그리고 자연에 대해 책임 있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게 하는 해방적 힘으로 정의한다. 기술지상주의가 갖는 망상처럼 기술이 신적 경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인간을 억압과 공포, 죽음으로 몰아가거나, 자연을 파괴하거나 착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모름지기 기술은 뭇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정의로 발전해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 기술은 평화사회(shalompia)를 창출한다.
현실세계에서 기술은 안타깝게도 평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현대 기술은 하나님, 인간과 자연에 대해 여전히 무책임하여 분열과 부조화를 꾀하는 듯 보인다. 기술의 만용으로 인간세계와 생태계가 고통 받으며 신음한다.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이 기술을 그릇 사용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다. 기독교인이 갖는 기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첨단 기술이 아무리 경제 성장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인류에게 생명과 안전, 평화를 위협한다면 과감히 배격돼야 마땅하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화를 계기로 평화산업이라는 원자력 발전소의 핵 기술이 죽음의 핵폭탄만큼이나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핵 원료인 우라늄 역시 고갈을 앞둔 석유처럼 2030년 이후엔 바닥난다. 미래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 원자로의 수명은 유한하다. 신원전 부지 선정과 건설, 핵 발전시설 가동비용, 방폐장 선정과 처리비용 등을 원자력을 통한 저비용 전력 수급과 비교해 볼 때 결코 경제성이 높은 것이 아니다. 비좁은 한국 땅에 밀집돼 가동되고 있는 21기의 핵발전소는 유사시엔 전혀 안전하지 않다. 원자력 기술의 과감한 포기와 더불어 신재생에너지 기술의 획기적 전환이 시급하다.
강병오 서울신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