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반갑지 않은 손님
입력 2011-06-30 17:53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반갑지 아니한가?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내게도 공자님 말씀처럼 멀리서 벗이 찾아왔다. 그 벗을 맞으러 친한 동창들이 뭉쳤다. 느티나무의 짙은 그늘이 그리울 정도로 해가 뜨거운 날이었다.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피는 꽃이 이야기꽃이다. 여자 친구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이야기꽃이 활짝 폈다. 모란꽃 함박꽃 못지않게 이야기꽃 역시 소담스럽고 화사하다. 이야기꽃 사이사이 웃음꽃도 폈다.
서로 젊어졌다는 하얀 거짓말과 동창들 안부로 이야기꽃이 벙글더니 자식들 혼사 이야기에서는 화사하게 벌어진다. 요즘엔 시어머니들이 더 시집살이를 해, 얘. 아들 가진 친구는 아들 장가보내기 무섭다고 엄살을 떤다. 아직도 시어머니 위세가 세거든. 딸 가진 나는 딸 시집보내기 무섭다고 너스레 떤다. 모두 시집, 장가를 보낼 거면서.
이야기꽃은 마침내 유행하는 유머를 거름삼아 활짝 폈다. 입담이 좋지 않은 나는 듣는 편이다. 한 친구는 요즘 부쩍 깜박깜박하는데 치매 초기 같다며 호들갑이다. 그러자 입담 좋은 친구는 치매 관련 유머를 초급부터 높은 난이도까지 맛깔스럽게 쏟아놓았다. 우리는 아직 남의 일 같아 손뼉까지 치며 웃음꽃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내 우리 얼굴엔 걱정이 드리웠다. 치매가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 시모는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에 모셨단다. 아는 선배는 치매 노모를 10년 돌보다 선배가 먼저 죽게 생겼단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치매에 걸리면 어떡할래?
치매는 망각의 병이다. 때론 살아가는 데 적당한 망각도 필요하다. 고통스런 기억을 잊으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치매처럼 사랑하는 얼굴, 자기 이름, 자기 집까지 다 잊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나는 대답 대신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노부부가 동반 자살했는데 그 마음 이해돼. 치매가 오래가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지긋지긋함으로 기억될까봐 두려웠겠지. 그래도 자살이 최선은 아닐 거야. 신이 준 생명을 마음대로 버리는 건 죄니까. 또 남은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지만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내 말에 친구들도 부정을 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정부가 치매환자를 위한 복지정책에 좀 더 신경 써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갑지 않은 손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씁쓸해져서 화사하던 이야기꽃이 시들어버렸다.
우리는 힘없이 치매 예방법을 아는 대로 늘어놓았다. 원두커피를 하루 네댓 잔 정도 마셔라. 종교활동, 친목모임 같은 사회활동을 계속하며 즐겁게 살아라. 화투 치는 것도, 하루 1시간 이상 독서하는 것도 좋다. 많이 걸어라. 다 모아놓으니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배운 것은 실천해야 하는 법. 우리는 헤어질 때 친구가 가는 시외버스정류장까지 씩씩하게 걸었다. 절대 치매랑 친하지 말자. 더 건강하자. 마지막 이야기꽃을 길 위에 떨구면서.
오은영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