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공직사회의 부패불감증

입력 2011-06-30 17:53


“우리 사회가 바뀌고 있다. 과거의 관습으로 인정되던 게 용인되지 않고 있다.” 지난 27일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의 청와대 조찬회동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구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을 ‘관습’이라고 하는데…. 이게 요즘 대한민국의 골치 아픈 문제다.

공직사회에서 벌어지는 그들끼리의 내밀한 관습이 철저히 까발려지는 바람에 난리다. 그 조직에선 미풍양속이었던 촌지와 향응에서부터 공생관계의 징표인 전관예우 등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이건 관습의 탈을 쓴 악습이요 적폐다. 관행화된 비리에 다름 아니다.

특히 힘깨나 쓴다는 권력기관의 증세가 심하다. 촌지와 향응 접대의 스폰서 문화에 흠뻑 젖은 국내 최고의 엘리트 수사기관은 지난해 TV에 ‘검사와 스폰서’로 ‘출연’해 망신을 당했다. 금융당국의 내로라하는 형제집단은 더 심하다. ‘금융검찰’ 금융감독원은 저축은행 사태에 줄줄이 연루돼 아예 비리 덩어리로 낙인 찍혔다. 형님 격인 금융위원회도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1500여 가지의 규제 권한을 보유한 국토해양부의 ‘연찬회 향응’은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관습’

전관예우는 권력기관 특권 중 핵심이다. 개정 변호사법 시행과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국회 통과로 법조계와 부처 공직자들의 전관예우 폐단이 일부 사라질 전망이지만 교묘한 수법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돈벌이가 되면 뭐든 한다는 인식이 그들 조직에 만연돼 있다면 능히 그럴 만도 하다. 지난달 계약을 파기하긴 했지만 ‘전관’이나 마찬가지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이 부산저축은행 사건 수임을 통해 보여준 부도덕성은 압권이다.

비교 잣대가 다르겠지만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최근 판사들의 전관예우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퇴직 후 2년간 아예 변호사 개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게 부럽다. 우리는 판·검사와 고위 공무원이 퇴직 후 1년간 근무지 사건이나 관련 업무를 취급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야단법석이다. 판·검사를 비롯해 모든 공직자는 평생 나라를 위해 봉직하다 정년퇴임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게 싫으면 처음부터 공직을 선택하지 않으면 되니까.

각종 비리에 얽혀 있는 국세청의 전관예우는 입이 딱 벌어지게 한다. 세무행정 달인답게 ‘자문료 명목 재테크’라는 신종 수법을 개발했으니 수준이 높다. 국세청 국장 출신이 재직 당시 세무조사를 했던 기업체를 자문해주면서 매달 5000만원씩 5년간 받아 30억원 이상을 벌었단다. 중소기업 부장급 평균 연봉이 4700여만원인데 이 돈을 한 달마다 챙긴 셈이다. 그럼에도 사법 처리가 쉽지 않다니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최신판 범죄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지금 공직사회를 개혁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전관예우 금지법 외에도 비리의 싹을 자르기 위한 각종 대책이 논의 중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 줌의 권력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저항이 거세다. 국무총리실 산하 ‘금융감독 혁신 태스크포스(TF)’의 금감원 개혁 방안 발표가 8월로 연기된 것은 이 때문이다. 차기 대선 때까지 대충 개혁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들고 버티면 된다는 인식도 문제다.

권력분산에서 답 찾아야

관가에 자정 운동과 청렴 교육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그것도 우습다. 물론 의식개혁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익 추구를 버리고 공인 의식을 되찾을지 의문이다. 금감원에 이어 국세청이 엊그제 대폭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지만 사람만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업계와의 유착이 없어질 일도 아니다. 권력 크기에 따라 비리 소지가 커지기 마련이다. 권한이 집중된 기관의 부패가 심한 건 그래서다. 답은 거기서부터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 혁신이 어렵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