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입력 2011-06-29 17:50


한진중공업에 얽힌 기억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잿빛 기억들이다.

대학생이던 1991년 5월 어느 날 경기도 안양에 간 적이 있다. 한진중공업의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정보기관원을 만나러 갔다가 사망한 채로 발견돼 안양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경찰이 사인을 감추기 위해 시신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안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이 병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결국 들어가지 못한 채 여러 노동자와 몇몇 학생들이 병원 안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며 시신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 한 신문에는 해머로 구멍을 뚫은 병원 영안실 벽 사이로 백골단이 쏟아져 들어가는 사진이 실렸다. 군사정권의 마지막 몸부림을 상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안실을 지켰던 노동자와 학생들은 모두 연행됐다. 시신을 탈취한 경찰이 공식 발표한 박창수 위원장 사인은 ‘단순 추락사’였으나 수긍하는 사람은 없었다. 군사정권이 끝난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나섰지만 죽음의 진실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연행된 학생 중에는 평생 우정을 함께 나누자 했던 친구가 있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와 재수생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친구는 최고 명문대에 합격해 시골 어른들의 자랑거리가 됐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엔 전과자였다. 몇 개월을 갇혀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그 친구의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 그 친구의 삶에서 그날은 매번 앞길을 가로막았다. 번듯한 직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고 어렵사리 직장에 들어가서도 순탄치 않았다. 몇 군데의 회사에서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직장에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2003년 한진중공업에 대한 기억도 잿빛이다. 그해에도 노조위원장의 죽음이 있었다. 명예퇴직에 반대하며 회사와 맞섰던 김주익 노조위원장은 크레인에 올라 ‘불법 해고, 손배 가압류 철회’를 주장했다.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되던 10월 어느 날, 그는 지상으로부터 30여m 떨어진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보름쯤 지났을까, 그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 곽재규 조합원이 크레인 뒤쪽 도크에서 11m 아래로 몸을 던져 숨졌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이 흘렀다. 김주익 노조위원장이 생을 마감했던 그 장소, 85호 타워 크레인에 지금은 50대의 한 여성이 올라가 8년 전과 비슷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다. 한진중공업에서 용접노동자로 일했던 그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그곳에서 170여 일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박창수·김주익 전 노조위원장과 함께 일했었고 항상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안고 살았다. 김주익 전 노조위원장이 숨진 후 8년간 죄책감 때문에 한 번도 보일러를 켜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장기화되자 국회도 나섰지만 아직은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29일 청문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증인으로 채택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불참함에 따라 사실상 무산됐다. 국회 일각에선 노사가 협상을 타결한 만큼 청문회가 불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이었던 정리해고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은 노사 협상을 인정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 30여m 상공의 크레인에 한 사람이 남아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 1월 크레인에 오르기 직전 남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익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가 스스로 걸어서 크레인을 내려왔으면 좋겠다. 이번만큼은 한진중공업에 대한 기억이 잿빛으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국회와 우리 사회의 중재 노력을 기대한다.

정승훈 특집기획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