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공산당 90주년] 개혁·개방 노선 주효… ‘죽의 장막’서 글로벌 리더로

입력 2011-06-29 21:31


중국이 다음 달 1일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다. 중국 공산당은 치열한 내부 투쟁, 외세에 항전 등을 겪으며 신(新)중국을 건국했다. 이후 공산당은 1당 지배체제를 유지하면서 중국을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G2(주요 2개국)로 성장시켰다. 공산당의 성공 배후에는 철저한 통제와 강력한 개발독재, 시대에 부응하는 꾸준한 변신이 있었다.

◇창당에서 새 중국 건국까지=지난 27일 오후 중국 공산당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상하이 ‘중공 1대 회의터(中共 一大 會址)’ 기념관은 창당 90주년을 맞아 성지를 찾는 남녀노소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신톈디(新天地)에 위치한 이곳엔 90년 전 신문과 잡지, 창당 주역들의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어 창당 당시 상황을 실감케 했다. 요즘 하루 평균 관람객이 5000여명에 이른다고 기념관 관계자는 설명했다.

바로 이곳에서 1921년 7월 23일 마오쩌둥(毛澤東) 등 청년 공산당 대표 13명이 모였고, 회의에서 공산당 탄생을 선포했다. 당시 당원은 불과 53명이었다. 이후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국공합작(國共合作)과 내전,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거대 공룡’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공산당은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이뤄내고, 26년 국민당과 공동으로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이는 쑨원(孫文)이 중국 각지의 군벌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모든 반(反)군벌세력과 연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5년 쑨원 사망으로 이러한 명분의 중심을 잃었다. 쑨원에 이어 실권을 잡은 장제스(蔣介石)는 반공(反共)의 중심인물로 27년 4월 상하이에서 공산당 세력을 타도하는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공산당은 국민당에 쫓겨 34년 10월 9600㎞의 ‘대장정’에 올랐고,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대장정은 마오쩌둥 지도체제 확립의 계기가 됐고, 공산당 혁명노선의 단일화를 이뤄 소모적인 내분이나 계파 갈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37년 다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이후 45년 일본 제국주의가 무너지자 공산당은 46년부터 국민당과의 내전에 돌입했다. 3년간의 내전에서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를 격파, 마침내 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잠자는 사자’가 G2로 변신=공산당의 신중국은 끊임없는 이념·권력투쟁으로 심한 내홍을 겪으면서도 실용주의 노선을 통해 변신을 거듭, 국제사회 리더로 우뚝 섰다.

국가 수립에 성공한 공산당은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제도를 전면 실시했다. 50년 발발한 6·25전쟁에 참가하고, 티베트를 강점하면서 대외적으로 무력도 과시했다. 58년부터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해 낙후된 농촌사회에서 산업화된 국가로의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과 66년부터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중국사회와 경제, 문화를 퇴보시켰다. 일련의 사건들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기도 했다. ‘잠자는 사자’ ‘죽(竹)의 장막’ 등은 이때 나온 표현이다.

중국 대변신의 서막은 78년 12월 공산당이 덩샤오핑(鄧小平) 주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면서부터다. 공산당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고, 30여년 만에 중국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려놨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등을 거치면서 국제사회 리더로서의 이미지도 구축했다.

이런 결과는 중국 공산당의 당원 수, 생명력, 변신능력, 경제건설 능력 등을 세계 최고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당원은 지난해 말 현재 8026만9000명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정당이 됐다. 1952년 679억 위안이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39조7983억 위안으로 586배 늘었다.

1인당 GDP도 같은 기간 119위안에서 2만9748위안으로 250배가량 급증했다. 외환보유고는 1952년 1억3900만 달러에서 올해 3월 현재 3조447억 달러로 2만1900배나 증가했다.

상하이=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