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남들이 욕할지 모르지만… 난리 덕에 이름자라도 쓰지”

입력 2011-06-29 18:08


강원 화천군 하남면 길양순 할머니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에 사는 길양순(75·소망교회 권사) 할머니. 6·25는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었다. 난리 통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새로운 삶도 열어주었다. 인민군에 끌려간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동갑내기 남편 이귀원씨도 이때 부모, 가까운 친척 모두와 헤어졌다.

길 할머니는 외동으로 태어나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학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가방 들고 학교 가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학교 가야 할 나이에 만주에 있었고, 배다른 동생 봐주기에 바빴다. 전쟁고아가 되어 보육원에 들어간 후 딴 세계가 펼쳐졌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욕할지 모르지만 난 난리 덕에 내 이름자라도 쓰게 됐어요. 그래서 난리 덕을 봤다고 그래요.”

만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

풍산에서 태어나서 요리 시집을 왔어요. 우린 난리 때 다 없어졌어요. 아버지는 반장이셨어요. 동네사람이 더 무섭더라고요. 동네 사람이 인민군한테 속삭속삭 대가지고 아버지를 첫 번째로 붙잡아가선…. 뒤로 간 사람들은 다 나왔거든요. 안 돌아오신 거 보면 돌아가셨겠지요. 여기 화천으로 끌고 와 가지고선 죽인 거죠.

형제도 없어요. 서모가 와서 난 남매가 있었는데 피난 들어가서 다 죽었어요. 지금은 친정도 없고 형제도 없어요. 그래서 외로워요. 시집도 그래요. 작은집하고 우리하고 아홉 식구가 이북으로 들어갔어요. 여기가 북한 땅이었는데 피난을 북으로 간 거예요. 그 식구들만 만나면 그래도 끌끌하단<든든하단> 말이에요. 여기서 선생도 하고 그랬는데 다들 들어가 가지고서는 제 대에 못 만나보면 통성을 해야 어떻게 만나볼까 그러지요. 우리는 왜 이북으로 못들어갔냐면요, 가까운 데로 다니다가 거길 안 들어갔어요. 우리 영감도 할머니 할아버지 쫓아다니다가 못 가고요. 여기 가까운 친척이 없어요. 7촌 8촌 그런 사람들만 있어요. 한동네에서 사니까 자주 만나요.

어머니랑도 못 살았어요. 아버지는 공회당으로 이불을 들고 돌아다니며 잤어요. 잔치<결혼>를 했는데 엄마가 싫다고. 어떻게 나를 낳았나봐요. 어릴 때 만주로 들어가셨어요. 기술 배운다고. 기술을 많이 배웠드라고요. 엄마는 내버리고 나랑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고모랑 들어오라고 그랬대요. 저는 어리니까 모르잖아요. 만주로 쫓아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기술자로 돈은 잘 벌었어요.

만주에서는 고모 학교 쫓아다니고 그랬죠. 나보다 한 살 위예요. 세살 때 들어가서 아홉 살에 나왔어요. 그때 안 나올 건데 한국사람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고 그러더라고요. 안 나온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는 나와서 고생했잖아요. 지금 거기 살았으면 중국사람 됐겄지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어머니는 사근사근하지도 않고 좀 모자랐나봐요. 여동생이 있었대요. 선을 볼 때는 여동생을 내보냈더래요. 잔치날 싹 바꿔치기했대요. 잔치까지 했으니 어떡해요. 처갓집에 가서 얘기도 못하고. 마음에 없으니까는 나가서 돌아다니니까 어떻게 해서 나 하나 낳고 만주로 가버린 거예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서모에 대한 거지요. 둘이 피난 가서 서모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혼자니까 밥도 못 먹겠고 어디 가서 벌어먹어요? 열네 살인데. 여기 어디 보육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지요. 안양보육원에. 혼잔데 난리통에 부모도 다 잃고 했으니 여기 있게 해달라고 했지요. 원장이 나오더니 “너 옘병<염병·장티푸스> 앓았냐”고 물어요. “예 사흘 앓았어요.” 개통<두 번째 앓는 것>해서 머리가 안 빠졌으니까 물어보더라고요. “조금 앓았어요. 근데 나았어요” 하니까 목욕을 시키라고 하더라고요. 목욕하고 옷을 싹 갈아입히고 거기서 공부했지요. 여기서는 애만 보고 학교도 못 다녔어요. 서모가 저 열 살 때쯤 들어와 3∼4년 같이 살았어요. 서모는 아들 딸 낳았어요. 동생보라고 공부도 안 시켰어요. 다섯 살짜리 아이를 업고 피난 갔어요. 수동으로 들어갔어요. 한 달 있다가 개가 옘병을 개통해서 앓다가 죽었잖아요. 아들은 아기 때 풍산서 죽고요. 그래서 서모랑 둘이 나온 거예요. 서모도 개통을 해서 나가서 돌아가셨어요.

만주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가 딸이라고 만나러 왔더라고요. 친척할머니가 저보고 그래요. 엄마 왔다고. 그런데 제가 우리 엄마는 죽었다고 그랬죠. 대구<자꾸> 아버지랑 서모가 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죽은 줄 알았죠. 그리고 그냥 나가서 뛰어놀았죠. 그랬더니 엄마가 눈물을 흘리더래요. 그래도 딸이잖아요. 자기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싫어서 버린 거니까. 새로 시집을 갔더라고요. 5남매 낳고 잘 살았어요. 좋으나 나쁘나 엄마가 있었으면 아들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가 난봉을 부려서.

나는 난리 덕을 봤어요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집에서는 공부 못했는데 난리가 나서 피난 가 거기 들어가서 내 이름자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지요. 열네 살이라고 3학년에 들어갔죠. 아무것도 모르는 게 3학년이니. 여기는 5학년이 6학년 맞잡이에요<똑같아요>. 초등학교가 5학년이 끝이에요. 그런 애들하고 배우니까 뚝 떨어지는 거예요.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해서 대구 읽고 그랬어요. 어느날 선생님이 구구단을 외우라고 그러더라고요. 끄트머리에 서 있다가 애들 하는 것 듣고 배웠어요. 뜨덤뜨덤<띄엄띄엄> 했죠. 선생님이 “너는 모르는구나” 하셔서 “예 저는 하나도 공부 안 했어요”라고 했어요. “근데 어떻게 아냐”고 해서 “앞에 애들 하는 거 듣고 했다”고 했어요. 그래도 60점을 맞았어요. 선생님이 “너는 낙제인데 내가 올려줄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열심히 해서 졸업할 때 80점을 맞았어요. 미술을 좀 잘 그려서 거기서 점수를 많이 땄거든요. 학교에서도 지도를 그려서 붙이고 그랬어요. 미술에서 점수를 따서 올라가서 배웠어요. 집에서 애들 가방 들고 학교 가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요. 부모가 있는데도 이러니. 난리가 나서 이름자라도 아니까요. 내가 그래요 사람들한테.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 욕을 하겠지만 “나는 난리 덕을 봤다”고 말해요. “난리가 났기 때문에 내가 이름자라도 쓴다” 그랬어요.

원장님이 훌륭하세요. 원장님이 젊어선 개구졌대요. 들어오면 부인을 때리고 그랬는데 예수 믿고 달라졌대요. 저희도 원장님이 예수님을 알게 했죠. 거기서 하나님 말씀 시험을 봤어요. 제 이름을 첫 번째 부르더라고요.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 않아서 떨어졌구나’ 생각했죠. 그랬더니 “니가 잘 해서 그랬어”라고 했어요. “음악도 잘하지 뭣도 잘하고 시험도 잘해서 그래.” 거기 미술 선생이 그래요. “딴 데 가지 말고 미술학원을 가든지 미술 하는 데로 가라. 그렇게 배우면 넌 미술가가 될 거야”라고 그랬어요. 살래도 뭐 있어야 사잖아요. 그래서 여건이 맞지 않아 걷어치웠어요. 누가 밀어주면 됐을 텐데.

그때 이후로 그림을 안 그리다가 한만경 목사님이 계실 때 한 번 그려봤어요. 공책에 자기가 그날 읽을 걸 적어가지고 나오래요. 적고 재주껏 하라고 해서 글씨에 색깔 넣고 그림을 그렸어요. 주로 사람을 많이 그렸어요. 그때 집사로 있을 땐데 목사님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어요. 아깝다고 그러더라고요.

인연을 만나다

안양서 여기 놀러왔다가 걸려든 거예요. 걸려들어서 시집을 이리로 오게 됐어요. 방학이 돼서 풍산서 살다 이사 온 친구 보러 왔어요. 걔가 병이 들었더라고요. 폐병. 친구 보고 나갔다 또 보러 들어왔는데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못 보고 그러고 있는데 친구 할머니가 소개해서 이리 오게 됐잖아요. 스물한 살 때. 늦은 나이죠. 나는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안 가겠다 생각했죠. 보육원에서 스무 살쯤 나왔죠. 안 나와도 되는데 여기 보러 왔다가 걸려들어서.

동갑내기 이귀원이에요. 시할머니하고 살더라고요. 3년 사시고 가셨어요. 남편은 2남 1녀 중 막내예요. 유복자예요. 시아버지가 일곱 달 만에 돌아가셨대요. 시아버지가 수리조합에 다니고 누나는 군청에 다니고 성<형>은 선생님으로 있었고 그랬대요. 집안이 넉넉했어요. 영감의 누나 엄마 성 이렇게 들어가고 작은집 식구 여섯이 북으로 피난갔데요.

피난 갔다 와서 어렵게 살았어요. 전에는 농토가 있었는데 6촌 시할아버지 팔았대요. 농토도 없어 고생이 많았대요. 남의 농토도 부치고 품 팔러 다니고. 영감이 자기만 품을 팔아도 서럽다며 나는 안 시키더라고요. 나를 굉장히 아꼈어요. 송아지를 사서 길러서 땅을 샀잖아요. 내 땅이라고. 놀러가자고 해도 안 갔어요.

산 사람은 살아지대요

그날 논뜨락<논>을 깎고 공계란<삶은 계란>이 먹고 싶다고 그래요. 장사가 오면 사먹자고 했죠. 마침 그놈의 장사가 오네요. 저기 온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왔어요. 두 판을 사놓고서는 돈 가지러 간 사이에 계란을 주더래요. 날계란을 성성한<상한> 걸 줬는지…. 먹은 사람도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니 날도 이렇게 뜨거운데 왜 그걸 잡쉈어요. 선선하거든 잡숫지.” 그렇게 하고선 집으로 들어와서 저녁을 먹었는데 두 판을 다 삶으래요. “아니 두 판을 삶아서 누가 먹어요”라고 했어요. 큰딸은 마흔에 시집을 줬거든요. 아들 둘은 놀러나가고. 한 판만 삶았어요. 난 좋아하지도 않아요. 밥을 이만큼을 먹고. 화덕에 계란을 끓였어요. 그걸 다 먹고 방에 들어가더라고요.

설거지를 하는데 방에서 ‘악’하는 소리가 나길래 들어가니까 배를 주물러 달래요. “암만해도 체한 거 아니에요? 소화제 줄까요” 하니 그러래요. 그리고 요강에 토했어요. 토했으니까 낫겠지 했어요. 아 근데 차차 죽어가면서 말을 못하네요. 애들을 불러다가 경운기에 이불을 깔고 화천을 나왔어요. 그때는 다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배로 건너갔잖아요. 의원에 가니 주사를 놔주고 집으로 가래요. 그래서 다시 택시를 불러 춘천으로 나갔지요. 그러다보니 날이 훤히 새요. 딸이 춘천에 있어 딸한테 가서 아빠가 이상해서 나왔다고 하니까 돈을 해가지고 사우<사위>하고 왔더라고요. 벌써 돌아가신 걸 모르고 우리가 간 거예요. 한림대 갔더니 돌아가셨다고 해서 영구차 불러 아침에 들어왔잖아요. 3일 장사를 지냈어요.

하늘이 무너졌는지 땅이 솟았는지 저녁이면 들어오는 거 같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금실이 아주 좋았어요. 읍에 나가도 꼭 같이 나가고. 사람들이 잉꼬부분데 한 사람 떨어져서 어떡하냐고 해서 “억지로 죽으면, 내 목숨 내가 끊으면 큰 죄 아니에요? 그러니깐 어떻게 살겠지요” 했죠. 그래도 먹게끔 해놓고 돌아갔어요.

교회도 생기고 다리도 생겼는데…

여기 교회가 안 서서 못 나갔어요. 화천에 교회 한 번 나갔어요.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다리가 없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해서 하루해야 해요. 품 팔아 먹는데 멀어서 못 갔어요. 다리 놓는다고 영감이 좋아했는데. 85년 영감이 돌아간 다음에 다리를 놨어요. 다리도 못 건너보고. 86년에 교회 생기고 다리 생기고. ‘영감이 살았으면 같이 다니고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있었어요.

교회 지을 때도 봤거든요. ‘교회 생기는구나. 나도 이제 교회 나갈 수 있구나. 기회가 얼마나 좋은가.’ 아주 기쁘더라고요. 피난 나가서 다니던 교회가 맺히더라고요. ‘교회 가까운 데로 시집갈 걸’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어려서 하나님을 영접한 게 싹이 시들지 않고 견고해지더라고요. 교회 지을 때 기쁘고 반가웠어요. 친구하고 나하고 첫 성도가 됐어요. 동네사람들도 전도해 많이 나왔어요.

교회가 없어 못 나갈 때도 아이들한테 “피난 나가서 내가 다녔다. 근데 그게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항상 이날 이때까정 내 마음에서 솟아난다. 니들도 하나님을 영접해야 편안히 산다. 편안히 사는 것보다 신앙을 가져야 사람이 정직한 마음이 생기고 남을 위로할 줄도 알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고 늘 얘기를 했어요. 큰아들도 제사를 안 지내요. 처음 시집 왔을 때 할머니가 제사를 지냈는데 나는 차려만 주고 안 지냈어요. 그렇게 싫더라고요. 영감하고도 교회 생기면 다니자고 했거든요. 애들은 여기에서 저들 해 먹으라 그러고 우리는 시내에 나가서 아파트 사서 구경이나 다니자. 고생했으니까. 그렇게 약속해놓고 먼저 갔잖아요. 영감 있을 때는 성경도 읽고 나더러 찬송도 불러달라고 그래요. 찬송가도 따라 하고. 여기 있었으면 다녔죠. 아들들은 안 다니는데 며느리 손자 다 다녀요. 그래도 명일<명절>때 예배 보면 다 봐요.

손자들 위해 놓지 못하는 농사일

영감 없고 아들 며느리 얻어놓고 9년 동안 강촌 가 있었어요. 혼자 살고 싶어서요. 4년 정도 아파트 청소도 하고 길 풀도 뽑고 했어요. 그렇게 벌어먹다 5년간 공장에서 밥 했어요. 돈 조금 벌어서 여기다가 논 사고. 그러다가 들어왔죠. 대구 난 안 들어오려고 했는데…. 아들 며느리가 들어가자고 그래서 더 나이 들어 일도 못하면 구박 받을까봐 그냥 들어왔어요. 들어오니까 마음은 편한데 몸은 힘들어요. 아들 며느리 농사짓는 거 도와주고 하우스하고. 2년 전부터 아들이 오리탕집을 해서 힘들어요. 내가 힘드니까 애들 보기에 딱한지 이제 장사도 접는다고 해요. 지금 군인 간 손자 둘이 오면 다시 대학 가야 하는데 등록금이 너무 비싸잖아요. 그러니 열심히 벌어놔야 하니까 뭐라고 말도 못해요.

바라는 거 별거 없어요. 우리 아이들 다 구원받아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식들이 됐으면 좋겠고 제가 건강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아멘 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 소망교회

1986년 5월 19일 서울 광서교회 이병춘 권사(당시 춘천 MBC 상무이사)와 부인 맹명자 집사가 농촌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건축 봉헌하기로 작정했다. 86년 9월 27일 예배당 건축 기공, 12월 19일 교회 창립예배와 함께 예배당 봉헌예배를 드렸다. 교회대지와 건축물 일체를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 증여했다. 같은 날 교단 춘천서지방에서 김승수 전도사를 담임전도사(서리)로 파송했다. 현 담임목사는 2009년 부임해 7대 목사로 재임 중이다. 올해 교회 표어는 ‘지혜가 더해가는 성도’이다. 교회는 벽진 이씨, 해평 길씨 집성촌인 용암리·상화리 지역을 위해 세워졌다. 재적·출석 성도수는 성인·아이 합쳐 30여명이다.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711-1(033-441-6655).

화천=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