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 인공관절 전문가 꿈 품고 美 유학길

입력 2011-06-29 17:32


“닥터 리, 당신 나라가 어렵다고 하던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 예, 괜찮을 겁니다.”

1997년 8월. 미국 볼티모어 항구가 보이는 존스홉킨스대학병원 도서관. 나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국과 우리 가정을 걱정해 준 미국인 지도교수님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내와 두 아들이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6달러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곳에 교환교수로 온 분들은 1달러에 1900원으로 환율이 치솟자 한국으로 대부분 떠났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돈은 반 토막이 났다.

주변에선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불과 6개월전 미국에 도착할 때만 해도 인공관절 분야의 세계적인 흐름을 익힌 뒤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미국 연수를 위해 우리 가족은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한 상태였다. 연세가 지긋하신 부모님께 힘들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경에 줄을 쳐가면서 말씀을 읽는 것이었다. 깨알 같은 주석까지 줄을 쳤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내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흰머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인생의 바닥이었다. 그때는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가난해졌다. 미국 의사들과 수술실에 들어가서도 집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2달러99센트 하는 햄버거를 시켜도 가족이 먹으려면 최소 12달러는 있어야 하는데….’ 미국에 오자마자 구입한 13년 된 혼다 어코드는 고장이 계속 나다보니 ‘돈 먹는 하마’처럼 목돈을 퍼부어야 했다. 결국 포기하고 장기기증단체에 기부했다.

간절한 기도의 힘이었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 올 때 1년 뒤에나 지급받기로 했던 장학금을 미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장학금을 지급해주는 곳이 하버드대병원이었다.

사실 내가 있던 존스홉킨스대병원은 하버드대병원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우리로 따지면 삼성과 엘지의 관계와도 같은데 담당 교수님이 하버드대병원에 ‘닥터 리의 고국 상황이 무척 어렵게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장학금을 미리 지급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자 답신이 왔다. ‘닥터 리가 당신 병원에 있는 동안은 어렵겠습니다. 그는 현재 당신 병원에서 의사로 육성하기 위한 과정에 있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우리 병원과 당신 병원은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인공관절 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헝거포드 박사는 나를 연구실로 불러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닥터 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교수님, 저희 가정은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편지를 한번 다시 보내보죠.”

우리 부부는 주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방값만 해도 매달 725달러가 나가던 상황에서 장학금 말고는 우리 네 식구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얼마 후 하버드대에서 연락이 왔다. ‘좋습니다. 우리가 당신 병원의 닥터 리에게 줄 장학금을 미리 지급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눈물의 간절한 기도는 문제를 해결한다. 특히 평생 눈물로 새벽제단을 쌓으셨던 어머니의 기도는 늘 위기상황에서 든든한 방패가 됐다.

약력=1961년 인천 출생, 광림교회 장로, 1997년 한양대 의대 의학박사, 1997∼1999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박사연구원, 피츠버그대 의대 스포츠의학연구소 객원 연구원, 하버드대 의대 정형외과학 방문연구원, 2001년 서울 선한목자병원장, 2004년 라오스 파키스탄에 선교병원 설립, 2006년 네팔 병원 설립, 2009년 미얀마 병원 설립, 2011년 필리핀 병원 설립.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