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교회 소녀 반주자, 피아니스트되다… 이종섭-유라씨 부녀의 ‘희망 2중주’

입력 2011-06-30 10:24


가녀린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그녀의 길고 흰 손가락은 건반을 캔버스 삼아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키예프의 대문’. 관객의 심장은 곡의 장대함만큼 쿵쾅거렸다.

웅장한 멜로디가 끝난 자리를 환호와 박수갈채가 대신 채웠다. 그는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이내 떨리는 가슴으로 객석을 둘러봤다.

26일 서울 여의도 영산아트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 첫 독주회에 나선 이유라(29)씨가 서 있었다. 연주를 끝낸 뒤 밀려온 감동을 주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두 얼굴, 아빠와 엄마. 시선이 맞닿은 자리에서 오랜 고생, 그 아련했던 기억이 피어올랐다. 눈물과 뒤섞인 함박웃음. 그녀, 웃고 있는데 울고 있었다.

유라, 피아노를 만나다

피아노와 친구가 된 건 7살 때였다. TV 광고가 어린 유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명 악기 회사의 광고였어요. 또래 아이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와 숲 속에서 피아노를 쳤죠. 그 아이가 너무 예뻐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튿날 아침, 온 가족이 다니는 충남 아산 둔포면 둔포감리교회로 달려갔다. 피아노에 앉아 조그만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소리가 곱고 맑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나도 TV 속 아이처럼 될 수 있을 거야.’

교회 찬양 반주자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조그만 시골에서 피아노를 가르쳐 줄 사람은 반주자 선생님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초·중등부 예배 반주를 유라에게 맡겼다.

“제 반주에 맞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았어요.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 반주를 한 게 아니라 반주를 잘하기 위해 피아노를 더 열심히 쳤죠.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는데도 피아니스트가 된 데에는 반주 봉사가 큰 도움이 됐어요.”

출중한 재능, 그것 때문에 망설임은 커져만 갔다. 어려운 생활 형편. 돈이 많이 드는 음악 공부를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 쌀이 없을 정도였어요. 국수를 끓여 먹곤 했죠. 그래도 참 맛있게 후루룩 한 접시를 다 비웠었는데….”

꿈을 포기하려 할 무렵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왜 요즘에 피아노 안 치니.” “은혜롭게 잘 치는데 계속 해야지.” 교회 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전을 울리고 또 울렸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새로운 힘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내가 갈 길을 알려주신 게 아닐까.’ 기도 끝에 그녀는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아끼고 또 아끼고, 악착같이 장학금을 받으며 충남예고와 중앙대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어려운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야간면장’ 울 아빠

그런 유라씨를 사랑스럽게, 그리고 묵묵히 지켜보던 사람. 이종섭(57)씨. 아빠다. 둔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친 뒤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술을 좋아한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다. 이씨,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어릴 때부터 힘든 삶을 살아서일까. 두 자녀의 아비가 되어서도 그는 어렵고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라가 어렸을 때부터 참 예뻤어요.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다고. 보행기도 없어서 옆집에서 버린 것 챙겨와 태워줬지만 제 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딸이 원하는 것, 다 해주고 싶었다. 5만원을 벌든 6만원을 벌든…. 그는 뛰었다. 일거리만 있으면 부락 어디든 찾아가 일을 했다. “하나님께서 건강 하나는 끝내주게 주셨어. 아파 본 적이 없다고. 무거운 짐 들어도 아직까지 끄떡없어요.”

기능직 8급 공무원인 이씨는 둔포면의 ‘야간면장’ ‘맥가이버 면장’으로 불린다. 마을의 최고 유명인사다. 1990년 1월 14일 둔포면사무소에서 기능직 말단 공무원으로 일을 시작한 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 붙은 별명이다. 영화 ‘홍반장’은 딱 그의 얘기였다.

면사무소의 불이 꺼지면, 이씨의 휴대전화엔 불이 난다. “‘하수도가 막혔다’ ‘가로등이 꺼졌다’ ‘전구가 나갔다’ 다 저한테 전화가 와요. 전구가 나갔다고 연락이 오면 집에 있는 것 가져다 끼워 주고, 없으면 전파사 가서 사다주죠. 큰 봉사는 못하지만 작은 거라도 나서는 게 도리니까요.”

‘야간면장’의 일과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허리를 방바닥에 오래 대고 있으면 불편하다 했다. 28일 만난 그, 휴대전화가 수시로 벨소리를 뿜어냈다. “전신주가 기울어졌어요. 빨리 와주세요.” 수화기를 통해 어렴풋이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긴 다급했나보다. 전봇대 기울어진 것도 해결해주냐고 묻자 “하면 다 돼”라며 껄껄 웃는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그는 낙천적이다. 유라씨가 아빠를 쏙 빼닮은 구석이기도 하다. “기도하면 다 이뤄지니까 믿고 나가는 거죠. 앞만 보고 뛰면 좋은 기회가 분명히 와요.”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둔포교회의 권사다웠다.

유라씨는 이런 아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참 좋다. “아빠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얼굴이 바로 울 아빠의 얼굴이 아닐까요.”

깊게 파인 주름엔 선한 미소가 숨어 있었다. 유라씨는 그 주름을 아름답게 생각했다. 웃어서 생긴 것만이 아닌, 자신을 위한 기도와 고생의 나이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학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극복

그런 아빠 엄마를 보고 자란 유라씨, 한 가지 마음만 되새겼다. ‘잘하든 못하든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 말자. 날 위해 애쓰고 기도하시는 엄마 아빠 실망시키지 말자.’

대학 때 모은 많지 않은 돈을 가지고 무모하게 독일로 향했다. 유학 시절, 경제적 어려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1유로(약 1500원) 쓰기도 아까웠다. 배가 고파 빵을 주워 먹은 적도 있었다. “차비 아끼려고 무임승차를 한 번 했는데 하필이면 역무원에게 걸려서 25배나 되는 돈을 물어줬어요. 다른 건 아껴도 그때부터 표 값은 아끼지 않았죠.”

학교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조차 그녀에겐 사치였다.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 멸치볶음을 연습 도중 먹었다. 그마저도 냄새가 날까봐 몰래 숨어 먹곤 했다.

하지만 힘든 유학생활에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힘의 원천은 일기와 성경말씀. 그녀는 일기를 통해 매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왜 이 길을 가는가, 무슨 뜻이 있으시나…. 하나님과의 대화는 큰 힘을 줬다.

유학 가기 직전 선물로 받은 성경책 앞장, 목사님이 써준 글귀도 마음에 담대함을 불어넣었다.

‘유라야! 부르짖으면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단다. 유학생활 기도하며 승리하여라(2004. 9. 30). 둔포 손혁 목사.’

유학 초반 겪었던 고난과 괴로움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해 갔다. 7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지난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유라씨는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돼 있었다. 이번 연주회에서도 그 성숙함은 빛을 발했다.

“연주회 당일 오전 11시, 2부 예배 반주를 다 마치고 서울로 향했어요. 미용실 예약도 부랴부랴 오후 3시로 한 시간 미뤘죠. 지인들은 조급해했지만 저는 믿고 있었어요. 하나님 중심으로 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는 걸요.”

어렸을 땐 다른 부모만큼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의 엄마 아빠가 창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엄마 아빠가 자랑스럽고 감사하단다.

“자신감 없고 주눅 들어 있는 아이에게 부모님께 배운 인내와 성실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피아노, 음악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제 꿈이죠.” 차분한 어조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장마철, 비가 많이 내리면 지붕에서 물이 샐까봐 걱정하면서도 “그럼 뭐 집에서 우산 쓰지”라며 웃음을 잃지 않는 유라씨. 그녀의 웃음을 뒤로 한 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또 생긴 아빠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산=글 조국현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