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노조 시대] ‘無노조 경영’ 삼성·포스코에 새 노조 들어서나

입력 2011-06-26 18:39


다음 달 1일부터 개별 기업의 복수노조 설립이 허용된다. 그동안 ‘무노조 경영’을 철학으로 내세웠던 삼성, CJ, 신세계 등 범삼성가(家)를 비롯해 포스코 등에서 노조 설립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아직 역풍을 우려해 물밑 모색 단계이지만 어느 정도 세를 갖추면 우후죽순처럼 노조 설립 선언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노조를 견제하기 위한 사측의 움직임 속에 사무직·관리직 노조가 대거 등장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무노조 기업에 노조 깃발을=민주노총은 지난 1월 ‘삼성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삼성그룹 계열사의 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주요 공략 대상은 삼성전자 탕정·기흥·구미 공장과 삼성에버랜드 등으로 알려졌다. 지난 23일 행정소송에서 반도체 공장 근로자들이 백혈병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삼성전자가 가장 뜨거운 사업장으로 꼽힌다. 산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피해자가 더 생기기 전에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노동자에게 일깨워주고 시스템을 안전하게 관리해주는 노조가 있었으면 이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싸우는 동안 노조 조직을 위한 활동도 병행했다. 사내에서도 제법 호응이 많아 끊임없는 물밑 후원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노총과 제3노총 설립을 추진 중인 서울지하철노조도 삼성 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포스코도 대표적인 무노조 사업장으로 꼽힌다. 포스코 직원 1만6000명 가운데 노조원은 13명에 불과하다. 포스코는 포항제철 시절인 1990년대 초 조합원 1만9800명을 거느린 거대 노조가 있었지만 조합원 생일선물 납품업체 선정과정에서 노조간부가 금품을 받은 사실이 폭로된 뒤 노조원들이 대거 노조를 탈퇴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노동계는 오래전부터 이들 기업을 노조 설립의 표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개별 기업의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악용해 노조 설립 움직임이 있을 경우 유령노조를 먼저 설립하는 방식 등으로 막아왔다. 그러나 다음 달 1일부터는 개별 기업의 복수노조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동안 써먹었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당장 노조 설립 신고서가 쇄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충분히 세력을 키워야 사측의 회유와 압박을 견뎌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복수노조 시대의 노사관계=복수노조 시행은 무노조 사업장엔 노조 설립의 기폭제로 작용하는 한편 노조가 있는 기업에서도 노조 간 경쟁을 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복수노조 시행을 앞둔 한국노총은 소속 단위 노조가 신설 노조와의 선명성 경쟁에서 밀려 세력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많다. 한국노총에 따르면 LG전자 노조는 대기업 노조 중 온건합리노선을 견지해온 대표적 조직이다. 하지만 타임오프제 시행으로 기존 34명의 전임자가 11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투력’이 약한 온건 노조는 임단협에서 무급 전임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상급단체 의무금을 50% 축소해 5명의 무급전임자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 상황을 두고 한국노총은 26일 “의무금의 축소는 금속연맹과 한국노총의 활동력을 약화시켜 오히려 합리적 노동운동 세력의 위축을 초래하고 강경세력의 침투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노무 컨설팅을 하는 노무사들을 위주로 복수노조 대응 매뉴얼이 나돌고 있다. 개별 근로자에 대한 내용으로는 고충처리제도를 활성화해 불만을 미리 해소하고, 중간 관리자를 적극 활용해 여론을 수렴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온건하고 사측에 우호적인 세력을 전략적으로 지원해 노조를 만들게 하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관리·사무직 노조 대거 등장?=현대자동차 등 강성 노조가 우세한 제조업 사업장에선 관리직·사무직 노조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사측이 기존 노조의 세력 약화를 위해 ‘작업’을 펼칠 여지도 있어 새로운 노사갈등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다음 달 1일부터 시행되는 노조법은 교섭에 참여하는 노조는 의무적으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창구 단일화에 참여한 조합원의 과반수를 차지해야 교섭 대표권을 얻을 수 있고 쟁의행위에 돌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생산직과 사무직이 혼재돼 있는 현 상태에서 사무직을 가입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조합이 생기면 그만큼 현 노조의 힘이 빠지게 된다. 게다가 사무직과 관리직은 승진·전보 등 인사에 있어서 생산직보다 회사의 압력에 취약하다. 노·노 갈등을 부추겨 강성 노조의 조직력을 약화시키고 교섭기간을 늘려 조합원의 관심을 떨어뜨리는 전술이다. 하지만 사측이 직접 노조 설립에 나설 경우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돼 처벌을 받기 때문에 우회 지원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