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성공회 성지를 가다
입력 2011-06-26 17:52
[미션라이프] 비바람이 그치지 않던 지난 24~25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성도 20여명이 강화도로 향했다. ‘한국의 아이오나’ 강화도에 숨겨진 믿음의 흔적들을 더듬기 위해서다.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으로 원래 유배지였지만 6세기경 수도원이 만들어지면서 영국 대륙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초기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꿈꾸며 강화도를 아이오나로 여겼던 것이다.
강화도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선교사는 영국 성공회 소속 워너(왕란도) 신부였다. 하지만 강화도 안에는 얼씬도 못했다. 20~30년 전에 있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외국인의 출입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워너는 대신 강화외성 출입문 밖 갑곶이 나루터 근처에 세를 얻었다. 1893년 7월, 성공회의 강화도 선교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워너는 부랑아 2명을 양육하고 건강을 위해 축구를 소개하기도 했다.
영국 성공회는 강화도 선교를 본격화하기 위해 선교본부와 신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마침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교관인 콜웰 대위의 사택을 개조해 선교본부를 세우고, 성공회신학교와 진료소도 문을 열었다. 사역자를 훈련해 강화도뿐만 아니라 북한까지 파송했다. 몇 년 전까지 빈집처럼 남아 있던 선교본부 터는 지금은 풀만 무성했다. 성지 해설을 맡은 주성식(성공회 영등포교회) 신부는 “선배들의 위대한 믿음에 대해 말이나 글로만 알릴 게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전해줘야 한다”며 역사자료관 설립을 제안했다.
바로 옆 언덕엔 강화읍성당이 우뚝 서 있다. 유불선 등 조선의 전통가옥 양식에다가 바실리카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다. 전체 구조는 배 모양이다. 강화도의 구원선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경복궁 신축을 담당했던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대들보 나무들은 백두산 적송을 뗏목으로 이송해다 썼다. 문화재청 지정 424호로 매주 수천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주일엔 100여명의 성도가 미사를 드린다.
성공회 선교사들과 국내 신자들은 강화읍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두 번의 양요(洋擾)를 거친 강화도 주민들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알마타 수녀와 길로다(힐러리 신부의 부인) 선교사는 풍토병으로 이 땅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온수리, 내리, 흥왕리, 석포리교회 설립의 열매로 맺혀졌다.
석모도선착장으로 향했다. 지척에 보이는 저편의 섬엔 성공회 석포리교회가 있다. 배로 5분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당시 강화도에서 석모도로 가는 뱃길은 급류 때문에 목숨이 위태했다. 이 외진 섬에 담대하게 복음을 처음 들고간 이가 110년 전 성공회 소속 힐러리(길광준) 신부였다. 마을과 밭 사이에 버섯 모양의 아담한 교회가 저절러 감탄을 자아냈다. 잔디까지 깔린 교회에서는 그러나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한때 120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신부를 모실 형편도 안될 만큼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묘소는 강화읍내의 속칭 ‘십자산’이라는 야산 꼭대기에 있다. 일행들이 찾아갔을 때는 수풀이 온통 묘지를 뒤덮고 있었다. 무성한 풀을 하나하나 뽑아내자 비로소 봉분이며 비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덤 옆 돌십자가엔 시멘트로 때운 흔적이 무수했다. 한국전쟁 당시 총탄 자국이라고 한다. 연신 풀을 뽑던 고영순 성도는 “강화도의 아픔,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선교사와 선배 들의 사랑과 헌신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며 무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공회 선수리교회는 한국전쟁 통에 생긴 경우다. 주장훈 신부는 원래 평양교회를 담당했지만 전쟁이 나면서 교인들을 데리고 고향 강화도 장화리로 월남했다. 주 신부는 교회 대신 사랑방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특유의 다정다감으로 복음을 확장해갔다. 지금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의 교회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온갖 미신이 횡행하던 곳이었다. 장화리에서 이곳까지 몇 시간을 걸어서 목회를 했던 것이다.
이밖에 성공회 내리교회의 손갑용 신부는 훌륭한 인품으로 ‘성인’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한학자이면서 한의사였던 그는 주민들에게 무료로 약을 지어줬다.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 때는 일본경찰과 인민군도 그의 인품에 감복해 교회 종의 반출을 않고 그를 풀어줬을 정도다. 이같은 성품으로 그는 한국인 최초 명예사제가 됐다. 그 외에도 강화도엔 오직 복음을 위해 자신의 과수원 밭을 바치거나 신분 상승을 포기했던 숱한 신앙선배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묻혀 있다.
강화=글·사진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