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지방 넘기] 바리새인 ‘따로’ 모여 행했지만 예수님은 ‘함께’ 즐기길 원하셔

입력 2011-06-23 17:32


탕자의 비유를 보면 돌아온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작은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며 가락지를 끼워주고, 종들을 불러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3)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기쁨을 온 식구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던 큰아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냅니다. 집안 식구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큰아들은 ‘즐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큰아들도 분명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큰아들은 제 친구들과 즐기고 싶다는 속내를 은연중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어우러져서 ‘함께’ 즐기기를 원하지만 큰아들은 식구들을 제쳐놓고 자기 친구들만 몇 명 모아놓고 ‘따로’ 즐기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잡느냐도 다릅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송아지 정도는 잡아야 집안 식구들이 골고루 배불리 먹을 수 있지요. 큰아들은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서 친구들하고 올망졸망 술잔치를 벌이고 싶어합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지만 큰아들이 원하는 것은 끼리끼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유대 종교지도층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따로’ 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따로 모이고, 따로 식사하고, 따로 기도하고(눅 18:11), 따로 즐거워합니다. 자기네들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거룩한 무리라고 자부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과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함께’ 행하기를 즐겨했습니다. 무리들과 함께 지내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밀밭 길을 걸어가고, 함께 잠을 잤습니다.

탕자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도 함께 즐기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잃은 양을 다시 찾은 목자는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고 말하고, 잃었던 드라크마를 다시 찾은 여인도 역시 벗과 이웃들에게 “나와 함께 즐기자”고 권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넉넉한 사람과 부족한 사람이 함께 즐기고,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함께 즐기고,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함께 즐기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즐기고, 주인과 종이 함께 즐기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음악 중에 ‘여민락(與民樂)’이 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몇몇 사람만 즐거워하는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어깨춤을 추고, 온 누리에 여민락이 울려 퍼지는 ‘우리들의 천국’입니다.

오종윤 목사 (군산 대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