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배심원’ 재판 지켜본뒤 1시간 가량 토론… “범죄 의도성·형량 판단 어렵네요”
입력 2011-06-22 22:00
22일 오후 4시40분 서울 남부지방법원 4층 회의실. 기자를 포함한 그림자 배심원 5명이 이날 열린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평의를 진행했다.
그림자 배심원은 실제 배심원과 똑같이 재판을 참관하고 평의·평결도 내리지만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많은 국민이 배심원을 체험해 재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만든 제도다.
이날 재판은 지난해 10월 서울 행당동 왕십리역 인근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박모씨의 지갑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백모(41)씨에 대한 선거공판이었다. 재판의 쟁점은 백씨의 유죄 여부가 아니라 범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검찰은 동종 전과 7범인 백씨가 출소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같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상습범이라고 주장했다. 상습범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백씨는 상습범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출소 뒤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해 방황하다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검사와 변호인은 백씨와 공범을 증인으로 불러 백씨의 의도성을 따졌다. 그림자 배심원들은 방청석에 앉아 누구의 증거가 타당한지 살폈다. 피고와 증인의 표정, 말투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림자 배심원들은 5시간40분가량 재판을 지켜본 뒤 평의를 진행했다. 검사와 변호인 측이 제시한 증거가 합리적이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일부터 시작됐다. 정모(31)씨는 “검찰 측 주장은 백씨가 출소 후 겪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배제한 것 같다”며 “백씨가 범죄 이후 구속 때까지 5개월간 죄를 짓지 않은 점을 봤을 때 습관성은 없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유모(30)씨는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지갑을 훔친 게 6번이나 된다”며 습관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1시간 정도 토론이 진행됐지만 만장일치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재판을 참관한 판사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판사는 습관성을 판단할 때 범죄자의 성격, 직업, 전과, 범행 동기, 이전 범죄와의 시간적 간격과 내용의 유사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라고 조언했다.
재논의 끝에 5명 중 3명이 습관성이 없다는 의견을 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적용은 지나치다는 결론이다.
이번엔 양형 정도를 논의했다. 평의 때와 달리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재판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막상 형량을 결정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논의 끝에 이전 판결을 기준삼아 2년형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림자 배심원들의 결정은 진짜 배심원의 뜻과는 달랐다. 배심원들은 백씨가 습관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점이 인정된다며 만장일치로 유죄를 결정했다. 남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판사 김용관)는 백씨에게 징역 4년형을 선고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