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철 장로의 6·25… 세 번의 생사 갈림길서 세 번 살아오다

입력 2011-06-22 17:53


일제강점기 강화도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다. 경기도 김포에 혹처럼 붙었던 땅은 한강에서 분류한 염하(鹽河)에 막혀 반도와 별거했다. 남대문교회 원로장로 송용철(80)씨는 강화군 양도면이 고향이다. 장남이었고 남동생이 셋이었다.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시집와서 자식들은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교회 장로인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처럼 촌부였다. 농토는 많지 않았지만 흉작은 없었다.

송씨는 해방 이듬해 염하를 건넜다. 인천에서 유학했다. 중학교 3학년 추석, 고향에 가려는데 담임교사가 승낙하지 않았다. 귀성객을 싣고 강화로 가던 배는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에서 침몰했다. 부력이 만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송씨가 타지 못한 배였다. 실종자들은 죽어서 강화에 도달했다. 20여일 뒤 길상산 남쪽 해변에 쓸려온 시신 중에는 자식 둘을 데리고 승선했던 고모도 있었다.

갈림길

북한군은 1950년 6월 군사분계선을 밀고 내려왔다. 중학교 5학년(지금 고2)이던 송씨는 인천에서 동거하던 당숙과 귀향했다. 당숙은 한 살 많았다. 두 사람은 8월 강화에서 인민군 치안대에 잡혔다.

인민군이 끌고 가는 행렬은 빗속을 걸었다. 대낮의 비는 억수 같았다. 마을 교회 앞에서 길이 갈렸다. 샛길로 빠지자고 당숙에게 속삭였다. 당숙은 “좀 더 따라가다 기회를 보겠다”고 했다. 송씨만 이탈해서 남쪽으로 뛰었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마니산을 넘었다. 강화 남단 화도면에 외가가 있었다.

북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몰살했다는 소식은 염하를 건너 강화로 전해졌다. 거기 당숙도 있었을 것이다. 마을로 돌아갔을 때 당숙의 어머니는 “같이 가지 이놈아. 왜 너만 가서 이렇게 살아오고 내 아들은 못 돌아오니”라며 가슴을 쳤다. 그해 9월 서해상은 포성으로 어지러웠다.

고요한 행렬

전쟁은 해를 넘겼다. 강화 주민은 작은 섬들로 피신했다. 국민방위군이 배를 뒤졌다. 방위군은 이승만 대통령을 지원하던 우익청년단체가 1·4후퇴 때 향토방위 명분으로 재편된 조직이었다. 송씨는 다른 장정들과 색출됐다. 가족이 탄 배가 출항한 뒤였다. 방위군에 차출된 남자들은 육지로 옮겨졌다.

행군은 김포에서 시작됐다. 침묵의 장사진이었다. 수백 명이 앞사람만 보고 걸었다. 탱크와 무기가 부서져서 길가에 널려 있었다. 국군과 인민군의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 자정쯤 멈췄다. 밤에 당도하는 마을에서 잤다. 부산으로 간다고만 들었다. 가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약 30㎞ 험로였다. 눈밭에 무릎 밑까지 묻혔다. 동상 환자가 속출했고 걷다가 굶어 죽었다. 앞뒤에서 쓰러져 비탈을 굴렀다.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말없이 걷는 장정들은 움직이는 시체 같았다. 21일간 걸었다. 방위군의 양곡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제주행 상륙함

부산 거리에서는 미군이 남긴 음식 찌꺼기를 한 통에 끓여 팔았다. 돼지나 먹을 음식이란 말인지 이름이 꿀꿀이죽이었다. 송씨는 꿀꿀이죽을 사 먹다 경찰에 붙들렸다. 장정을 제주 육군훈련소로 보내고 있었다. 부두에서 남자들은 군용 상륙함에 꾸역꾸역 탔다. 부산까지 동행한 동료들도 보였다.

승선 대열은 송씨 앞에서 잘렸다. 배가 가라앉을 판이었다. 송씨는 울타리에 매달렸다. 배를 타는 게 살 길 같았다. 군인들이 송씨를 내쫓았다. 부두에서 쫓겨난 송씨는 텅 빈 마구간에서 울었다. 승선한 동료들은 1년여 뒤 전상자 명단에 올라왔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병력 통계를 낼 때였다.

송씨는 다음날 영도다리 부근에서 방위군 무리와 재회했다. 부산 구포에서 첫 제식훈련을 받았다. 내무반에서 주먹밥을 돌리면 마지막 서너 명은 못 먹었다. 누군가 빼돌렸다는 뜻이었다. 수용소엔 장티푸스와 이질이 창궐했다. 하루 평균 세 명씩 죽었다. 1100명 중 400명이 환자로 추산됐다.

휴전

방위군은 51년 4월 해체됐다. 장정은 예비군으로 전환됐다. 군복이 지급됐다. 무명을 물들인 옷이었다. 신발은 운동화였다. 포항에서 훈련받았다. 사람 뼈가 발에 차였다. 전쟁 초기 포항은 격전지였다. 예비군은 전장으로 조달됐다. 송씨는 집에 편지했다. 5개월 만에 전하는 생존 소식이었다.

52년 1월 대구 육군본부 행정병으로 발탁됐다. 부대별 병력 현황을 조사해 보급계통에 올렸다. 통계가 잡혀야 군수물자가 조달됐다. 전장의 통계는 신속이나 정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전부대는 거의 불통이었다. 전화를 받으면 “이 새끼들아, 니들이 조사해 가. 여긴 그럴 시간도, 사람도 없어”라며 끊었다. 1개 대대 120여명이 투입되면 30∼40명만 살아남는 전장의 상황이 숫자로 전해졌다.

병이 나서 대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창밖에선 자동차 엔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상자 후송 차량들이었다. 최대 1만5000명이 하룻밤에 들어왔다고 한다. 53년 1월 휴가를 내고 결혼했다. 강화에서 치른 결혼식에서 신부를 처음 만났다. 부모들이 정한 혼사였다. 6개월 뒤 휴전협정이 체결됐고 송씨는 제대했다.

세 번의 신혼

“하나님이 여러 번 살려주셨는데 보답을 못하고 살아요.”

최근 서울 남대문로5가 남대문교회에서 만난 송씨가 말했다.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그는 추석 귀성, 강화의 갈림길, 부산 부두 등 생사가 갈리는 기로에서 사는 쪽에 있었다. 6·25 기념일을 앞둔 심정을 물었다.

“생각을 안 하고 살아요. 과거에 매달리기보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어떻게 살 거냐를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송씨는 다만 강화에 가면 동숙과 헤어졌던 갈림길에 서서 당시를 회상한다고 했다.

송씨는 지난해 11월 집 뒤뜰에서 감을 따다 4m 아래로 낙상했다. 장독대 위에 사다리를 놓고 감나무에 올랐는데 반대편 가지로 몸을 돌리다 헛디뎠다. “밑에서 집사람이 감을 줍고 있었어요. 그 위로 떨어져서 겹쳤으면 둘 다 죽는 거야. 쌍초상 날 뻔했지.” 충돌을 연상시키듯 손뼉을 한 차례 치며 말했다. 발만 붓고 다른 외상이나 골절은 없었다고 한다. 팔순의 송씨는 키가 크지 않았지만 몸은 단단해 보였다.

송씨의 아내 박규란(78)씨가 느리게 걸어왔다. 박씨는 90년 척추 2, 3, 4번 뼈가 썩어서 주저앉을 처지였다. 송씨는 21년간 운영한 회사를 동업자에게 넘기고 간병에 집중했다. 박씨는 뼈가 되살아나서 투병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박씨는 59년 임신하고도 건성 늑막염으로 사경을 헤매다 회생했다.

“결혼식 포함해서 세 번 결혼한 심정으로 살아요. 우린 단순히 가까운 게 아니고 힘든 시절을 함께 극복해서 일심동체가 된 거예요.” 박씨는 “남편이 집에서 자꾸 ‘규란아, 규란아’ 이름을 부른다”며 웃었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최종학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