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바둑이야기] 이것이 승부다

입력 2011-06-22 17:40


적군이 몰려온다. 낭떠러지다. 이젠 끝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다. 한발 옮겨 디딜 곳도 없다. 팔은 잘리고 다리는 부러졌다. 와신상담하며 보냈던 지난 시간들은 온몸의 상처가 됐다. 벼랑으로 날 던지면 이젠 끝난다. 그러면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꼭 이기고 싶었다. 눈물이 흐른다.

승부에 있어서도 마지막은 있다. 그 순간에는 승패가 판가름 나고 생과 사가 결정된다. 승자는 환호성을 지르며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끓어오르고, 패자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슴이 타들어 간다. 살아남은 자도 살아남지 못한 자도 절치부심으로 지난한 시간들을 견뎌왔기에 우린 승자와 기쁨을 나눌 수도 없고 패자에게 위로를 건넬 수도 없다. 그래서 승부사의 길은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기전이자 변화와 도전의 격전장인 ‘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가 화려한 막을 올린 때는 지난 3월. 48명의 선수들은 각 팀(6명씩)에 소속돼 1년 동안 14라운드의 삶과 죽음을 맞이한다. 지난 19일 일요일 킥스(Kixx)와 티브로드(T-broad)의 시합으로 3라운드가 끝났다.

그런데 이번 리그는 이상하다. 14라운드 중에서 단지 3라운드 밖에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이상현상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지난 18일 경기에서 티브로드는 김승재·박영훈 선수의 2승으로 샴페인을 터뜨리는 듯했으나, 다음날 킥스 팀의 김시용·조한승·홍성지 선수에게 잇달아 패해 승패가 뒤집어졌다.

이렇게 승패가 바뀐 경우가 벌써 두 번째다. 또한 지난해 우승팀인 신안천일염은 포스코 LED팀에 5대 0 완봉패를 당해 현재 꼴찌 신세다. 모두가 강팀이라 지칭하던 킥스·영남일보는 가까스로 3연패를 면했다. 타이틀홀더 박영훈은 2지명자로 밀렸고, 제2의 이세돌이라 불리며 상대가 없어 보이던 박정환은 3연패로 슬럼프에 빠져있다. 비단 이런 통계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승부가 끝나 돌을 던질 절차만 남았던 시합이 역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예측할 수 없는 승부에 바둑애호가들은 흥분하며 환호하고 있다. 감독들은 매판 가슴이 오그라들고 오더를 결정하느라 손발이 저릿하다. 팀의 명예와 동료의 믿음을 업은 선수는 승부가 거의 결정적임에도 마지막 한수까지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들은 전신이 타들어가는 아픔을 견디며 승패 앞에 담담하다고 우기며 버틴다.

삶과 죽음, 승자와 패자, 그리고 기쁨과 슬픔. 벌써부터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아직 전초전에 불과하다. 진정한 승부는 지금부터다.

<프로 2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