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와 벗하던 그 시절 풍류에 젖어볼거나… 나주에 남아있는 亭子 30여곳 영산강 따라 둘러보기
입력 2011-06-22 21:35
호남의 젖줄 영산강은 담양 용추봉에서 발원해 광주 화순 나주 함평 영암 무안을 거쳐 목포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남도 삼백리를 흐르는 영산강은 혹은 대쪽같고 혹은 넉넉한 품성으로 가사문학을 비롯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 남도문화의 중심에 풍류와 사색의 공간인 정자가 있다.
영산강 물줄기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한 남도의 정자 중에서도 나주의 정자는 퇴락의 미(美)가 돋보인다. 비록 낡았지만 손때 묻은 정자 구석구석에는 그 옛날 자연을 벗했던 시인묵객들의 풍류와 체취가 스며있다. 비어있는 쓸쓸한 공간이지만 초하의 풍경을 산수화 삼은 정자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정갈해지는 이유이다.
나주 정자 여행의 출발점은 다시면 회진마을 앞 언덕에 자리한 영모정.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유명한 백호 임제(1549∼87)가 글을 배우고 시를 짓던 유서 깊은 정자로 천연염색문화관이 지척이다. 400년생 팽나무 거목에 둘러싸인 영모정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과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장어로 유명했던 구진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호는 조선 중종 때 벼슬을 지낸 시인으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는 시를 남긴 주인공. 황진이를 연모하던 백호는 평안도사 부임길에 송도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황진이가 죽은 후였다. 절망한 백호는 무덤을 찾아가 황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가를 남겼다.
이율곡도 인정한 천재 시인 백호는 나주로 낙향 후 부패관료와 망국적 붕당정치를 규탄하다 39살에 요절한다. 그리고 운명 직전 ‘물곡사(勿哭辭)’로 불리는 시 한 수를 유언으로 남긴다. “사방팔방의 오랑캐들은 저마다 황제국이라 칭하는데(四夷八蠻皆呼稱帝) 유독 조선만이 기어들어가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을 뿐이다(唯獨朝鮮入主中國) 내 살아 무엇하리(我生何爲) 내 죽은들 어떠하리(我死何爲) 울지 말아라(勿哭)” 영산강조차 물곡사비가 위치한 영모정 앞에서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흐른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라며 정자에 필요한 도구로 책, 베개, 바둑판 등을 꼽았다.
그렇다면 선비들은 어디서 어떻게 가무를 배웠을까. 영모정과 200m 떨어진 기오정은 여느 정자에 비해 규모도 크고 마룻방이 있는 독특한 구조다. 나주 사람들이 ‘멋쟁이 정자’로 부르는 기오정의 드넓은 마룻방은 선비들이 춤과 노래를 비롯해 거문고를 배우던 공간. 나주 선비들은 닫힌 공간인 기오정 마룻방에서 가무를 익힌 후 열린 공간인 정자에서 기예를 뽐냈던 것이다.
현재는 영모정을 비롯해 30여개의 정자가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에 200여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철 꽃이 핀다는 장춘정 등 대부분의 정자는 영산강을 이웃하지만 느티나무 고목에 둘러싸인 세지면의 벽류정처럼 샛강을 벗한 정자도 많았다.
다해포구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영산강 물길을 오르내리며 정자를 감상하는 재미는 나주에서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드라마 ‘주몽’의 세트장인 나주영상테마파크를 마주보는 다시면의 월계정은 달밤에 영산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정자. 황포돛배 물그림자와 어우러진 월계정의 정취가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여행을 떠난 듯 고즈넉하다.
거울처럼 잔잔한 S자 물길을 미끄러지던 황포돛배는 석관정과 금강정 사이의 강심에서 조용히 뱃머리를 돌린다. 바닷물은 1979년 영산강 하구언이 완공되기 전까지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뱃사공들은 정자가 즐비한 이곳을 지날 때 부르던 뱃노래를 그쳐야 할 정도로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강심까지 들려왔다고 한다.
다시면의 석관정은 나주는 물론 삼백리 영산강에서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기둥은 돌기둥으로 바뀌고 마루바닥을 대리석으로 치장해 운치는 덜하지만 강 건너에서 만나는 석관정의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절경의 연속이다. 특히 이른 아침 영산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정자를 휘감는 몽환적 분위기는 한 폭의 수묵화나 다름없다. 석관정에 ‘나주제일정(羅州第一亭)’과 ‘영산강제일경(榮山江第一景)’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이유다.
석관정에서 강 건너로 언뜻 보이는 정자는 금강정. 조선 후기에 건립된 금강정도 현대식으로 보수해 옛 맛은 떨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10분쯤 가파른 봉산을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쪽빛 같은 나주의 푸른 하늘과 강이 두루마리처럼 펼쳐진다. 다야들과 봉산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S자로 흐르는 영산강과 황포돛배는 옛 그림에서 보던 진경산수화.
정자가 선비를 위한 풍류의 공간이라면 모정(茅亭)은 서민을 위한 휴식공간이다. 모정은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얹은 정자로 마을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휴식처로 이용했다. 지금은 모정도 모두 기와를 얹었지만 강변에 위치한 정자와 달리 모정은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게 특징.
한양과 너무나 닮아 소경(小京)으로 불리던 나주에는 모정 없는 마을이 없다. 그 중에서도 다도면 판촌리의 고마마을은 특이하게도 모정이 두 개인 마을. 나주호 수몰민들이 모여 사는 고마마을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수십 그루가 마을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평화로운 농촌마을로 농번기에는 온 동네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오후 네댓 시가 되자 들일 나갔던 고마마을 촌로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정으로 모여든다. 걸쭉하면서도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로 모정이 왁자지껄하다. 다리쉼을 하려고 모정을 찾은 나그네도 스스럼없이 대화에 끼어든다. 그리고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자 모정은 잔칫집으로 변한다.
선비들이 떠난 정자는 나날이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오는 모정은 여전히 나주의 살아있는 정자가 아닐까?
나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