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늦게 내는 가위바위보

입력 2011-06-21 17:30


놀이터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인 듯한 남자가 눈을 감고 말한다. 제법 리듬을 섞은 말에 운율이 있다. 그러자 엄마로 보이는 여자와 아이들 넷이 아빠가 눈치 채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빠 등쪽으로 다가가며 발자국을 뗀다. 남자는 빠르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더니 돌아서 자기 쪽으로 오는 아이를 잡으려고 뛰어간다. 그러자 ‘와’하는 아이들 목소리가 저녁 공기 사이로 퍼진다. 유치 사이로 나오는 어린애들의 맑은 목소리를 언제 들어보았던가.

종종머리 땋은 어린 시절에는 개울, 넓은 빈터, 야트막한 야산이 놀이터였다. 한 여름 개울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다 소나기를 만나면 토란잎을 꺾어 머리에 썼다. 잎새에 구르는 물방울을 돌리며 걷다 보면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잔뜩 들어왔다. 가을이면 산자락의 보랏빛 용담과 하얀 갈대 사이를 숨바꼭질했다. 벼이삭에 맺힌 이슬에 바지 자락 젖는 줄 모르고 메뚜기 잡던 들판은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환상적이었다.

그때 올려다보던 하늘은 얼마나 눈이 아리던지. 숨을 쉬면 삽시간에 내 안으로 빨려 들어올 것 같았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가지를 다듬어 자치기를 했다. 새끼 자를 멀리 쳐내고 그것이 몇 자인지 길이를 잘 가늠하는 편이 이겼다. 편편한 돌멩이를 몇 개 주워 비석치기도 했다. 한발이나, 모듬발로, 발등이나 겨드랑이로 돌멩이를 가지고 가 비석을 쓰러뜨렸다.

이번에 강원도 평창 쪽으로 직원연수를 다녀왔다. 우리는 당연히 저녁에 노래방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타고 간 버스가 이상이 생겨 멀리 떨어진 노래방을 갈 수 없었다. 펜션 주인은 급히 장작을 모아 모닥불을 피워주었다. ‘타, 타닥’ 소리를 내며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불빛. 그 일렁이는 그림자에 동료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어둠 속의 불을 앞에 두고 우리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라는 노래가 나오자 잔잔한 합창으로 이어졌다. 모닥불이 사윌 때까지 강강술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돌았다. 모닥불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자 숲 속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두 손을 벌려 모닥불 주위로 좁혀 들어갔다. 그동안 도저히 화해되지 않을 것 같았던 갈등과 반목도 모닥불의 재처럼 사라져갔다. 생각해보니 그간 우리는 게임과 노래방과 회식에 갇힌 박제 같은 만남으로 살아왔던 건 아닌가 싶었다. 자연에서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놀이터의 남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아이들 얼굴에 주홍 불빛이 떨어진다. 아이들은 그대로 한 송이 꽃이 된다. “가위바위보” 한 아이가 낼 순간을 놓쳐 허공에 손을 들고 있다. 무르춤하다 내려온 손에 ‘보’가 펼쳐진다. “와, 이겼다.” 아이들의 윤기어린 목소리가 초여름 밤의 정점을 이룬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