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23) ‘사랑의 음악학교’ 운영 김지현 교수
입력 2011-06-20 21:32
“저소득층 청소년에 음악 레슨… 10년째 재능 기부”
토요일인 지난 11일 서울 정동 예원학교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 등을 연주하는 학생 오케스트라 연습이 한창이었다. 익숙한 솜씨로 음을 조율하고 곡을 맞춰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예원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인가 싶지만, 이들은 ‘LG 생활건강 뮤직아카데미’에 소속된 학생들이다. 9월에 있을 정기연주회를 앞둔 연습이다. 학생들의 연주회라고 무시하기 쉽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와의 협연이 예정돼 있는 등 만만치 않은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 이날 오전에는 ‘LG 사랑의 음악학교’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는 학생들이 나와 연습을 하고 갔다.
‘LG 생활건강 뮤직아카데미’와 ‘LG 사랑의 음악학교’는 재능은 있지만 레슨을 받기 힘든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무상 음악 교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뮤직아카데미’는 학생의 개인 레슨과 유스오케스트라단 활동을, ‘사랑의 음악학교’는 레슨과 실내악 연주 연습을 지원한다.
프로그램 명칭에서 알 수 있듯 LG그룹에서 후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2009년부터 시작된 이들 프로그램의 실질적 살림을 맡은 사람은 김지현 명지전문대 실용음악과 교수. 김 교수는 공연기획사이자 사회공헌기업인 ㈜캐주얼클래식 대표로, 10여년 전부터 ‘재능기부’를 해왔다. 그는 “이런 활동을 할 때 나나 우리 회사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오디션과 서류를 통해 선발된다. 오디션에선 실력보다 자질을 평가한다. 좋은 악기나 사교육의 도움을 받은 티가 나면 걸러진다. 서류에선 가구 소득과 건강보험료 납부 내역 등 경제사정을 중요하게 본다. 선발된 아이들은 주말마다 예원학교에 나와 연습을 한다.
아무리 엄격하게 뽑더라도 어린 학생들에겐 유혹이 많기 마련. 그러나 학칙은 엄격하다. 한 번 이상 무단결석하면 바로 퇴학 조치된다.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인 만큼 열정이 있는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대다수 아이들은 열심히 참여하지만 무단결석으로 퇴학당한 학생도 이제까지 2∼3명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음악 관련 재능기부는 2000년 돌아가신 부친의 영향에 힘입은 바 컸다.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을 못했지만, 부친 사후 재산 및 주변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남모르는 선행을 해왔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중학생인 김 교수를 조기유학 보내면서 ‘너는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나중에 남을 위해 써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신 아버지였다. 김 교수는 “‘아버지한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야겠다,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이 일을 선택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성악을 전공했던 그가 유학 중이던 1996년 갑상선암 치료를 받다 성대를 다치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병은 조기에 진단됐고 수술도 성공적이어서 일상생활엔 문제가 없었지만, 성악 전공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상하게도 그때 절망스럽지가 않았다”고 한다.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2000년 ‘줄리아드 뮤직 스쿨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장학생 선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재능 있는 젊은 음악학도를 발굴, 해외에서 연수를 받고 공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활동이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등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경제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기업들의 후원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유학 시절 접했던 미국의 기부문화는 김 교수가 후원 기업을 찾고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한 추진력이 됐다. 그가 후원을 요청한 기업들도 의외로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그가 운영한 ‘SK텔레콤 해피뮤직스쿨’은 2009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LG 사랑의 음악학교’의 사실상 전신이다. 김 교수는 ‘…뮤직아카데미’와 ‘사랑의 음악학교’ 프로그램에 대해 “LG그룹에선 이 활동에 대해 조건을 달지 않고 믿고 지원하고 있다. 기업에서 후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업으로부터 절대 인건비를 받지 않는다. 기업의 후원금은 아이들의 교육비와 프로그램 투자에만 쓰고 있다.
김 교수는 음악학교 프로그램으로 아이들도 혜택을 받지만 정작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강조했다. “이 활동으로 인해 제 인생도 많이 변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주말마다 이곳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갑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기회를 줄 수 있고, 그들이 해외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정말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김 교수는 오가는 학생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바이올리니스트’라거나 ‘피아니스트’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