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보고 싶다, ‘證道歌字’
입력 2011-06-20 17:32
누렇게 바랜 표지를 실로 묶은 고서가 있다. 87쪽 분량의 종이에는 단정하되 힘이 넘치는 활자가 촘촘히 박혀있다. ‘南明泉和尙頌證道歌’, 줄여서 ‘證道歌’라고 부르는 책이다. 당나라 승려 현각이 지은 선(禪) 지침서다. 닥종이에 찍은 책의 크기는 세로 27.5㎝, 가로 16.6㎝.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 중인 중조본(重彫本)은 금속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이다. 보물 제758호.
이 책이 서지학적 의미를 지닌 것은 말미에 적힌 ‘後序’ 때문이다. 고려 고종 26년(1239)에 당시 국무총리 격인 중서령(中書令) 최이(崔怡·?∼1249)가 이런 글을 붙였다. “선문(禪門)에 긴요한 책인데 전래가 끊겼으니 각공(刻工)을 모아 주자본(鑄字本)을 거듭 새겨 오래 전래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주자본’과 ‘거듭’이라는 단어다. 기존의 금속활자본이 있었는데, 이를 다시 만들어 출판했다는 뜻이다.
두 가지 팩트를 1239년이라는 연도와 맞추면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온다. 1377년에 간행돼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평가받는 ‘직지심체요절’보다 최소 138년 앞서니 인쇄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증도가’를 담은 금속활자본은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처음 공개된 ‘증도가자(字)’는 ‘증도가’ 판본을 능가하는 핫 이슈였다. 증도가를 찍은 금속활자의 현존사실이 알려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5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한 결과 목판본 ‘증도가’의 서체와 모양이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학적 검증이 약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주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마련한 학술대회는 이런 ‘증도가자’의 진위 논란을 잠재우는 자리였다. 국책기관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홍완 박사가 활자에 묻는 먹을 채취해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직지보다 앞선 770∼1280년의 것으로 판명한 것이다. 지난해 KBS의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일본의 연구기관에 의뢰해 얻은 결과와 비슷하다.
‘증도가자’의 발견은 올해 초조(初雕)대장경 간행 1000년을 맞는 우리 인쇄사의 쾌거다.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학계 공인을 받은 뒤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색창연한 100여 활자의 실물을 어서 보고 싶다. 무게 4g 내외, 한 면의 길이 7㎜에서 15㎜에 이르는 작은 금속물. 그 속에 IT 강국과 한류를 이끈 우리 민족 전래의 DNA가 숨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