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수 남몰래 방랑기(5)
입력 2011-06-20 13:40
“학위모자라면 가시관뿐이었소”
미국에서는 5월 말부터 6월 한 달 동안이 졸업시즌입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박사원까지 졸업식과 학위수여식으로 온 나라가 와글와글 합니다. 일만 명 넘게 졸업하는 큰 대학에서는 누가 보아도 엄청나게 큰 축제입니다. 그렇다고 두세 명 졸업하는 조그만 학교에서도 조용하지만은 않습니다. ‘커지고 싶은’ 행사를 벌이기 때문에 요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날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있는 에스라박사원 학위수여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나 예수도 무척 흠모하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학위수여식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위수여식장에 도착했습니다. 고색이 창연한 예배당이었습니다. 단상에는 ‘제7회 박사학위 수여식’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회중석은 벌써 꽃다발을 들고 온 사람들로 크게 붐볐습니다.
내빈석이라는 안내 표지 있는 곳에서 석 줄쯤 뒤에 앉았습니다. 곧 바로 주악이 울리자 회중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교기를 앞세우고 순서담당자, 이사진, 특별초청인사, 교수단, 학위수여후보자들이 각각 가운과 학위 모자를 쓰고 화려하게 입장했습니다. 교수단의 학위모자만 해도 몇 가지 다른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각모가 많았지만 빵떡모자, 베레모도 있었습니다. 가운과 후드는 패션쇼로 착각할 만큼 색깔과 디자인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입장순서가 끝나면서 학위수여식은 예배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설교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석하셔서 박사학위를 수여하여 주실 것‘이라고 확신 있게 선언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유난히 감격적인 소리로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다고 나 예수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 탄로 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설교가 끝나면서 비로소 순서지 전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철학박사학위 5명, 선교학박사 학위 7명, 상담학박사학위 10명, 목회학박사학위 15명, 그리고 명예신학박사학위 5명이 영광스러운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후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학위논문을 소개하고, 후드를 걸쳐 주고, 학위모자의 태설(tassel)을 옮겨 주고, 총장과 사진을 찍고, 박수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오는 것이 이 학위수여식의 절정 곧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학위를 받아본 일이 전혀 없는 나 예수에게는 그런 것 하나 하나가 모두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긴 긴 수여식이 끝나고 이번에는 여러 가지 시상을 했습니다. 특히 최우수논문상을 받은 새내기 여성 박사에게는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현대교회 설교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을 썼답니다. 나 예수도 그 내용과 결론이 무엇인지 읽고 싶었습니다.
총장훈화, 특별초청인사의 격려사, 졸업생 대표연설이 끝나 2시간 30분 정도가 지났는데 사회를 하는 대학원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같은 학위수여식은 예배 정신과 엄격한 전통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허지만 파격 있는 것이 학위수여식을 더 아름답고 뜻 깊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에는 없지만 파격으로 격려사 한 분을 내빈 가운데서 모셔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나 예수를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손짓 했습니다. 말하자면 ‘깜짝 순서’였습니다. 식장은 또 한 번 박수 소리가 천정까지 울렸습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한국말 성경에는 점성가를 뜻하는 ‘마고스’를 (동방)박사라고 번역한 까닭일까요, 한국 목사님들이 박사학위를 많이 받으시는군요. 그러나 예수라는 분에게 무슨 학위가 있었던가요? 아무런 학위가 없었지요...... 아니, 그분이 쓰신 학위 모자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가시관이지요.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가시관 말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쓰고 있는 그 박사학위 모자가 가시관으로 바꾸어지기를...... ”
나 예수는 목이 메어 격려사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석했던 여러 사람이 크게 놀랐답니다. 탱자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쓰고 피를 뚝뚝 흘리며 격려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박사학위 모자를 쓴 사람들 가운데는 그 참혹한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박사학위라는 비늘이 눈을 엄청 많이 가렸었나 봅니다.
이정근 목사(원수사랑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