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인민보안성 내부자료 최초 공개] 먹고살기 힘들어진 상인들, 단속 공안에 집단난동
입력 2011-06-20 01:14
[인민보안성 자료로 본 북한] (상) 北 주민의 실상
범죄가 그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인민보안성이 정리한 각종 수사기록인 ‘법투쟁부문 일군(일꾼)들을 위한 참고서’는 ‘북한 정부판 주민생활 실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수록된 721건의 사례는 심각한 경제·식량난, 체제에 대한 반발, 광범위한 남한 문화 침투, 미국 달러화 유통 등 그동안 소문으로만 알려졌던 북한 사회의 흔들리는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경제·식량난, 체제 반발=산업재해로 불구가 돼 공장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이만성은 동숙생인 한남호가 잠들었을 때 경비실의 도끼로 살해한 뒤 일부를 식용으로 먹고, 나머지는 시장에서 양고기로 속여 팔다 적발됐다. 100%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내용이 실린 것 자체가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간장에 소금물을 섞어 속여 파는 등 생계형 범죄 사례도 많았다. 양곡 수송대 소속 운전사가 차에 실은 쌀 5t을 시장에 내다팔다 걸리거나 협동농장 소를 훔친 사례, 트랙터 공장 노동자가 부품을 빼돌려 협동농장에서 식량과 교환하는 등 군이나 공장, 사업소 등에서 식량을 얻기 위한 범죄도 다수 소개됐다.
식량난에는 중간 관리자의 비리도 일조했다. 한 식량공급소장은 주민 공급용 식량을 야간을 이용해 친척과 간부들에게 1∼2개월분을 공급하는 바람에 주민들에게는 5일치 식량도 주지 못해 사회적 물의가 일어났다고 명시했다.
종이가 없어 학습장을 찍어내지 못하거나 온실을 지으면서 유리가 없어 암시장에서 흰쌀 5t과 유리를 교환하는 사례 등 심각한 원자재난도 드러났다. 협동농장 작업반장이 군 연유사업소에 벼 2t을 주고 트랙터용 디젤유 3t을 받았다가 ‘자재비법처분죄’로 처벌받기도 했다. 여성 공장회계원은 추위 때문에 2개월 동안 사무실에서 소형 전열기를 쓰다 적발돼 ‘전력사용질서위반죄’가 적용됐다.
집단 난동 사례도 있었다. 인민보안서 직원들이 시장 판매금지 품목을 집중 단속해 물건을 압수하자 20여명이 수매기관에 몰려가 책상을 뒤엎고 의자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시장 상인들이 “넌 술을 안 먹고 사는 놈인가”라며 단속 나온 공안기관원 얼굴에 술을 뿌린 경우도 소개됐다.
◇‘달러’면 다 통해=자료에 소개된 전체 형법 위반 사례 455건 가운데 21건에서 뇌물 등의 용도로 달러가 등장했다. ‘달러’만 있으면 신분증 위조는 물론 금속·마약 밀매, 재판장의 무죄 판결까지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정당방위초과살인죄’로 기소된 피소자의 사건을 재판하면서 600달러를 받고 무죄 판결을 내린 재판장은 ‘부당판결판정죄’나 ‘관리일꾼뇌물죄’에 해당된다는 사례가 있었다. 달러는 또 고위 간부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것 없이 주요 치부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한 도시경영관리부장은 국가 공공건물 13동과 살림집 1세대를 분양해주고 1만1810달러 등을 받았다가 적발됐다. 지역 전신전화소 직원이 전쟁 노병들의 가정에 전화를 우선 설치해야 하지만 평균 100∼200달러를 낸 가정에 전화를 설치해 줬다가 적발돼 처벌됐다는 내용도 있다.
한 무직자는 광산 주변 개인들에게 1600달러 등을 뿌리고 아연 등 금속 80t을 사들여 밀거래하다 적발됐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19일 “화폐개혁(2009년 11월 말) 이전에도 달러가 뇌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면서 “고위층일수록 달러를 선호하며,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고액 상품권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마약과 위조지폐 횡행=마약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도 소개됐다. 약학대학 교원이 자기 집에 설비를 차려놓고 마약 생산 원료를 구입해 ‘빙두’ 혹은 ‘아이스’(일종의 필로폰)라는 마약 500g을 제조, 밀매하다 적발됐다. 특수기관 노동자가 8000달러를 주고 마약 1㎏을 구입한 뒤 북부 국경지대에 들어가 1만2000달러에 팔아 차익을 챙기기도 했다.
위조지폐 유통도 지능화·조직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직자 2명이 인쇄 설비를 갖추고 4년간 5000원권 2400장과 휘발유표(교환권) 490장(7350㎏ 분량) 등 대량의 위폐와 가짜 유가증권 등을 만들어 5명의 불법 업자들을 통해 주요 도시와 군에 유통시켰다. 컴퓨터 전문가와 출판 종사자가 공모해 북한 최고 화폐 단위인 5000원권 20장을 찍어 유통시키다 적발되거나, 미술원이 1000원권 화폐 100장을 그려 날이 어두워지면 시장에 유통시킨 사건도 있었다.
◇남한과 서구문화 침투 사례=해안도시 거주자가 CD를 팔다 단속에 적발됐는데, 조사 결과 남한과 다른 국가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가 들어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출처를 확인해보니 CD는 무직자 함경호가 화교로부터 구입해 자신의 집에 복사 설비를 갖춰놓고 유통시킨 것이었다. 최명달이라는 사람은 해안 유원지에서 한 여성에게 남한과 미국 영화가 들어 있는 CD 3개를 사서 몰래 본 뒤 다시 내다 팔다 당국에 적발됐다.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처벌된 경우도 소개됐다. 마영길이라는 학생은 산에서 소형 라디오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몰래 밤마다 남한 방송을 청취했으며,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다 적발됐다. 남한이 심리전의 일환으로 보내고 있는 라디오가 어떻게 이용됐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인민보안부에서 2000년대 말까지 근무했던 탈북자 K씨는 “지금까지 북한에 남한 측 콘텐츠가 담긴 CD가 3000만장 정도 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내가 근무할 당시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 30만장 정도를 한꺼번에 적발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김나래 이성규 이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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