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개’ 연출 전재홍 감독 “한 달 만에 찍은 저예산 영화 재미는 블록버스터 못지않죠”
입력 2011-06-17 17:38
영화 ‘풍산개’의 전재홍(34) 감독은 김기덕(51) 감독의 수제자다. 2005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이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전 감독은 김 감독을 “참 좋은 분인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냥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자 아버지 같은 스승이라고 할 수 밖에…”라고 했다.
‘풍산개’는 김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16일 여의도에서 만난 전 감독은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발산했다.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지난 3년은 저와 (김기덕) 감독님에게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시기였어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생물조차 살지 못하는 폐허에 둘만 남은 느낌이었습니다. 풍산개는 기적적으로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새순 같은 존재였고요. 감독님과 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믿고 영화를 찍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죠.”
‘풍산개’는 휴전선을 넘나들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무엇이든 3시간 만에 배달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풍산(윤계상)이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애인인 인옥(김규리)을 북한에서 빼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 감독이 쓴 시나리오답게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을 옥죄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풍산과 인옥은 점차 비극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액션과 멜로를 기본으로 깔고 있는데 블랙코미디와 휴머니즘이 간간이 뒤섞이며 독특한 화음을 이룬다.
전 감독에게 ‘제2의 김기덕’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요. 감독님은 항상 ‘네 마음대로 찍어’라고 주문하시고 자신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전 슬프고 절박한데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등을 과감히 넣었죠. 영화는 어차피 관객들이 즐기라고 만드는 거니까요. 가뜩이나 남북한 대치 상황도 답답하고 어두운데 영화마저 칙칙하게 풀면, 누가 봐주겠습니까?”
전 감독은 한국 미술계의 거장인 김흥수 화백의 외손자다. 1993년 미국으로 이민 가 영화 ‘페임’으로 유명한 뉴욕의 라과디아예술고교에서 성악을 배우고 맨해튼대학 음대에 진학했다. 2000년에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시립음대에서 성악을, 웹스터유니버시티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인생 역정이 영화 연출에 든든한 힘이 됐다고 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나, 정확한 판단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이나 모두 영화감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전 감독은 김 감독을 만난 뒤 영화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7년 단편 ‘물고기’로 베니스국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 받았고, 2008년에는 장편 데뷔작 ‘아름답다’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초청과 후쿠오카 아시아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등을 일궈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김기덕 사단’이라는 말은 ‘훌륭하지만 흥행이 어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선입견을 불러와 전 감독과 김 감독을 힘들게 했다. 이들은 ‘풍산개’로 보란 듯 이런 편견을 깨뜨리자고 의기투합했다. 전 감독은 “저예산으로 한 달 만에 찍은 영화지만 그 어떤 블록버스터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 감독의 열정이 통했을까.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도 노개런티로 참여했다. 전 감독은 특히 윤계상과 김규리의 열정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국에서는 특정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들은 다른 역할을 해볼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하지요. 윤계상씨도 부드러운 남자라는 틀에 갇혀 있었지만 전 그의 몸에 훨씬 더 많은 것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풍산 역을 훌륭히 소화해줘 감격했어요. 김규리씨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이겨내고 인옥 역을 충실해 해줘서 감탄했습니다. 그동안 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저보다 더 열정적인 배우나 스태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