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철 전작 장편 ‘침대’… 인간의 삶, 침대로 말하다
입력 2011-06-17 17:37
침대/최수철/문학과지성사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광고 카피는 소설가 최수철에 이르러 ‘침대는 이야기다’라고 바뀔지 모른다. 1세기 전, 침대 하나가 시베리아에서 기차에 실린 채 세상을 떠돈다. 러시아의 리에파야 항구에 도착한 뒤 발틱 함대에 실려 대서양을 남하하여 희망봉을 돌고 싱가포르를 거쳐 대한해협에 이른 침대다. 100년 동안 세상을 떠도는 동안 지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침대로 경험하게 된 이 침대는 이제 사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환생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100년 동안 갇혀 있던 침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소설가 최수철(53)이다.
원고지 2000여장에 달하는 전작 장편 ‘침대’(문학과지성사)는 침대의 일대기를 빌린 동서교섭사이자 역사소설인 동시에 환상소설이라는 다양한 장르적 면모를 보여준다. 지난해 단편 ‘침대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들’로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한 최수철은 그 작품 말미에 이번 장편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내가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멈추는 까닭은 침대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번 장편 출간으로 자신과의 약속을 ‘무궁무진하게’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집필 중 머릿속에서 쉼없이 흘러나오는 침대에 관한 일화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행복에 겨운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고 있다. ‘침대’는 그만큼 최수철에게 궁합이 착착 들어맞는 작품인 것이다.
“나는 침대다. 아니, 나는 침대가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인간들을 위한 침대였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그루 나무였다. 하얀 나무줄기와 곧은 자태로, 숲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작나무였다.”(9쪽)
흔히 침대는 인간이 누워 잠을 잔다는 기능적 측면에서 관(棺)의 변형이지만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이미지는 ‘인간 꿈의 변형이 곧 침대다’고 규착된다. 한 그루의 커다란 자작나무는 벌목군의 도끼에 잘릴 뻔하다가 시베리아의 소년 마누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나 마누는 그의 여인 우그리나를 해치려는 악령 칼리우와 대결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 침대는 마누, 우그리나, 칼리우 세 영혼을 품는 관이 되었다가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실려 대륙을 가로지른다. 라에파야 항구에서 시인이자 의사인 안드레이의 침대가 된 ‘나’(침대)는 병원선에 실려 전쟁터로 향한다.
병원선이 일본 함대에 나포되어 일본의 사세보 항구에 강제 호송된 후 안드레이의 침대는 무라사키라는 잔혹한 일본군인의 수중에 들어간다. 장교 전용 구락부의 온천탕과 연결된 휴게실에 놓이게 된 침대는 온천물의 유황 성분이 자꾸 닿아서인지 검붉은 색의 기괴한 눈알처럼 생긴 옹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 옹이는 ‘악마의 눈’이라고 불린다. 침대는 다시 고위층의 침소로 옮겨지고 여기서 침대는 기생 후쿠쓰께와 만나게 된다. 한때 조선의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들어와 전국을 떠돌던 개화파 조선인 장선우와 사랑에 빠진 후쿠쓰께는 침대 위에서 아이를 출산한 뒤 죽는다. 이제 후쿠쓰께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침대는 세도가 송병수의 저택에 도착한다. 그러나 송병수의 집에 모아놓은 수많은 침대들은 조선을 침탈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후 침대는 유랑서커스단장에게로, 퇴각 중인 군인 박기수에게로 넘어갔다가 마침내 소설가를 만나 그 길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는 마치 베갯머리송사를 하듯이 자신이 구상하는 이야기를 침대에게 들려주었고, 그러면 그가 잠든 사이에 침대가 그를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완성시켜 주었다. 소설가가 침대의 입을 빌려 침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만 했다. 인간 삶의 백과사전은 다름 아닌 침대 속에 들어 있었다.”(521쪽)
소설 속의 ‘백과사전적인 소설을 쓰고자 했던 소설가’의 분신이기도 한 최수철은 “우리 삶은 각기 한 편의 우주적인 꿈이 아닐까 한다”며 “나는 침대에 누워 우리 모두의 삶을 꿈으로 꾸면서 그로부터 그치지 않는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