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어린 부모·늙은 아들 그 역설의 미학
입력 2011-06-17 17:38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창비
소설가 김애란(31). 바야흐로 생의 여름날을 지나고 있는 나이다. 2002년 약관의 나이에 등단한 이래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로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6개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대주로 주목받은 그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은 씨앗이 씨방을 찾아 깃드는 여름에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첫 장편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작가가 톡톡 던지는 가벼운 말투와 능청스러운 농담이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반면 담백하고 신선한 문장은 어느 순간에 소설을 의젓하고 품위 있는 빛깔로 채색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되었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프롤로그)
김애란은 이 소설에서 태아가 이제 곧 어머니가 될 미혼모를 다독이고 세상에 나와서도 어머니,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이 어린 부모를 오히려 위로하는 역설의 미학을 선사한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하는 소설은 열일곱 철없는 나이에 덜컥 아이를 가진 부모와 미처 자라기도 전에 누구보다 빨리 늙어버리는 조로증을 앓으면서 이제 부모가 자신을 잉태했을 때의 나이인 열일곱에 이른 아들 ‘아름’을 통해 적어도 지적 성숙도 면에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바뀌는 두 겹의 무늬를 그려 보인다.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이었다.”(67쪽)
어린 부모의 어른 되기를 지켜보는 아름은 자신을 향해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라고 질문을 한 뒤 이렇게 자답한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중략)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79쪽)
조로증으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름은 자신 때문에 잃어버린 부모의 청춘을 되찾아주기로 하고 어린 부모의 만남과 연애, 자신이 태어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열여덟 번째 생일에 부모에게 선물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그동안 평단에서는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의 특징을 중성(中性)성과 부성에 대한 긍정적 희화화에서 찾아왔다.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좌우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김애란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인 것이고 바로 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이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 보편성에 주력하려는 작가가 김애란임을 보여주는 작품이 이 소설이다.
소설의 압권은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아름이 이성에 눈뜨면서 겪는 내적 갈등이다.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 바람이 나를 보고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점이라고……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196쪽)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책 말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첫 만남에 대해 아름이 완성한 소설 ‘두근두근 이 여름’이 이어진다. ‘혼자 바지 내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열일곱 아버지 대수, ‘이 고장 남자랑은 절대로 안해’를 외치던 열일곱 미라의 비밀스런 여름은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매미가 여름에 왜 그토록 울어제치는지 절로 알게 된다. 까만 글자가 박힌 평면을 따라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체 속에서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소설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