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되짚어보는 아시아 슬픈 역사

입력 2011-06-16 17:47


시네마 온더로드/ 유재현 / 그린비

20여년 간 소설가로, 르포 작가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주로 제3세계 인민의 삶의 실상을 전달해 온 유재현(49)씨가 ‘시네마 온더로드’를 펴냈다.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소설 ‘구르는 돌’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그동안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과 쿠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미국 등을 돌며 5편의 ‘온더로드’를 발표했으니 이번이 6번째 시리즈다.

책은 중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등 아시아 14개국을 무대로 한 54편의 영화 이야기를 통해 스크린 건너편에 숨겨진 아픈 역사와 현실을 끄집어낸다. 에세이라지만 책은 영화를 통해 아시아의 진짜 근현대사를 되짚고 문화 제국주의의 실상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마치 사회역사서와 같다.

“글을 통해서는 결코 좁혀지지 않은 언어와 인종,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를 나는 영화 보기를 통해 좁힐 수 있었다. 스크린 속에는 책이 보여 주지 못하는 인간들의 숨결이 존재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초 아시아의 풍경과 인간들의 숨결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7쪽)

주말의 명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부터 영화의 변방 몽골에서 만들어진 ‘우르기’까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현재에 이르는 아시아 각국을 무대로 한 영화들이 총 4부에 걸쳐 다뤄진다. 2부 ‘공포를 향한 오디세이’ 편에서 저자는 작가 특유의 집요함으로 무장하고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기존 해석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영화 속에 숨은 제국주의의 광기와 공포를 포착해 낸다.

“미국의 반전운동은 미국의 자식들을 구해 내기 위한 운동이었다. 미국의 베트남 영화들은 결국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옥의 묵시록’은 이런 종류의 연민과 죄책감에 대해 지극히 인색하다. (중략) 영화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욕망과 자의식이 드리운 어둠의 핵심을 미국의 전쟁에 담아 그렸다는 점에서 미국의 어떤 베트남전쟁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거두었다.”(163∼169쪽)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와 영화에 대한 저자의 해박하고 풍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다. 저자는 서구 영화업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아시아 영화들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왕과 나’가 대표적인 예다. 태국 왕실 선생으로 6년간 일했던 영국인 애나 레노웬스의 일기를 바탕으로 마거릿 랜든이 1944년 출판한 책이 영화의 원작인데 저자는 태국 왕인 몽끗에게 확실한 주관을 내세우는 영화 속 영국인 여교사를 두고 “심각한 공주병에 걸려 쓴 질병적 일기를 바탕으로 마거릿 랜든이 날조해 낸 허구적 인물”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책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들이 주로 거론되고 아시아 각국의 복잡하고 세세한 역사가 이어지니 좀처럼 읽는 속도가 나질 않는다. 또 저자가 영화를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현실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문화 제국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서는 따분하고 거북하게 여길 수 있다. 그래도 이 책은 섬처럼 고립돼 온갖 상흔을 안고 있던 각국의 현대사를 영화를 통해 연결시키고 독자들에게 ‘아시아’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