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을 기다렸다 ‘나, 가수다’… 첫 앨범 ‘그대는 어디에’ 발표한 차지연
입력 2011-06-17 00:02
국악 악기 소리를 입으로 내는 구음(口音) 한 소절에 이 여자, 가수가 됐다. 지난달 말 싱글 앨범 ‘그대는 어디에’(작사·작곡 임재범)를 발표한 차지연(29)씨. 14일 서울 서초동 예당엔터테인먼트 하광훈(47) 음악사업본부장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하광훈은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부른 ‘빈잔’을 편곡했고, 차지연은 임재범과 함께 무대에 올라 ‘우∼우∼’ 하는 소리로 거들었다.
뮤지컬 배우인 그녀의 노래 실력은 검증된 지 오래다. ‘폭풍 가창력’이란 수식어는 오히려 새삼스럽다. 그런 그녀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고 말했다.
“저, 악보 볼 줄 몰라요. 물론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알죠. 하지만 더 전문적인 건 몰라요. 배운 적이 없어서. 노래는 어떻게 하냐고요? 녹음실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하광훈)이 몇 번 흥얼거려 주세요. 그걸 듣고 감으로 따라 불러요. 뮤지컬 할 때도 악보가 나오는데 저는 미리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 듣고 연습했어요.”
가수를 꿈꾸던 차지연에게 연예기획사들은 그동안 번번이 등을 돌렸다. 노래는 되는데 외모가 아니라거나 잘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건 다르다거나 왜 악보대로 못하느냐는 말로 상처를 주곤 했다. 그래서 뮤지컬을 시작한 게 2006년. 첫 무대가 ‘라이온 킹’이었다. 배역은 원숭이 마법사 ‘라피키’.
“지팡이 짚은 원숭이가 한 마리 나와요. 무대에서 그 원숭이만 딱 눈에 들어오는데 무슨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거야. 뮤지컬 제작자한테 저 친구 누구냐고, 그래서 처음 (차지연을) 만났는데 선머슴 같이 키 큰 여자애가 오더라고요.”
변진섭 이승철 김민우 조관우 김범수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작업해온 작곡가 하광훈은 차지연을 ‘발견’한 날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광훈이 불러 처음 녹음실에서 만나던 날, 두 사람은 뭔가 통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
“내 노래를 한 방에 부르는 가수는 처음 봤던 것 같아요. 10분 가르쳐주니까 ‘해 볼게요’ 하고선 딱 한 방에 불렀어요. 그럴 수가 없는 거거든요.”
연예기획사들이 보기엔 ‘연습생’이나 다름없던 차지연의 음악을 하광훈은 귀 기울여 들었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이 작곡가는 곡을 만들어주거나 음반을 내자고 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자”고 했다.
“언젠가 빛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죠. 하지만 아이돌 가수들이 대세여서 노래 잘하는 가수는 설 자리가 없었어요. 잘못 음반 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가수가 많으니까. 앞이 너무 안 보였거든요. 그럴 땐 기다려야죠.”
젊을수록 조급하기 마련이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처럼 쉽지 않다. 차지연은 뮤지컬 무대에 머물며 기다렸다. 가수 제의가 몇 번 들어오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하광훈) 선생님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으니까요. 다른 분하곤 전혀 (음반 낼 생각이 없었어요).” 하광훈에게도 차지연을 가수로 데뷔시키자는 제의가 몇몇 제작사에서 들어왔다. 그 역시 거절했다.
차지연은 판소리 고법(鼓法·북으로 장단 맞추는 것) 인간문화재 고(故) 박오용 선생의 외손녀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할아버지 북 소리와 창을 들으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북을 치곤 했다.
“배고프다, 밥 좀 해 와라. 그런 말씀도 전부 창으로 하셨어요. 배가∼고프다. 밥 좀 차려 오니라∼. 이렇게요.”
할아버지를 흉내 내던 손녀가 북을 잡고 창을 하기 시작했다. 세 살 때다.
“어느 날 북 앞에 앉더니 판소리를 하면서 북을 치더래요. 음정 박자가 정확해서 식구들 다 놀랐대요. 이 녀석 봐라, 하면서.”
그때부터 ‘국악 신동’이라며 여기저기 무대에 불려 다녔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1년 뒤 그녀는 할아버지의 북을 사사한 큰 삼촌에게 갔다.
“소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타악기가 좋았어요. 울림. 심장이 고동치는 울림이 좋아서 삼촌을 졸랐어요. 북 가르쳐 달라고.”
삼촌은 무슨 이유에선지 북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울며불며 매달려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도 국악대회 나가면 그녀가 곧잘 1등을 했다. 그러다 고교 2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다. 아버지는 빚만 남긴 채 어디론가 떠났고, 어머니는 아팠다. 삼촌은 여전히 북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앞이 안 보이더라고요.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했어요. 그래 북을 접자. 그럼 뭘 할까. 곰곰이 생각해봤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노래더라고요.”
어린시절 그녀가 노래하면 동네 할머니들이 과자도 주고 용돈도 줬다. 외할아버지의 북에 맞춰 창과 민요를 부르던 외할머니, 대전의 무명 통기타 가수였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차지연은 물려받았다.
고3 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여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했다. 가수가 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사업을 수습하느라 대전에 남았다. 지하 셋방 한 칸 얻어 시작한 서울생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고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아르바이트, 막노동 빼고 안 해본 게 없다. 서울예대에 들어가 장학금 받고 공부도 잠깐 했지만 생활고로 휴학했다. 뮤지컬 극단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진 건 행운이었다.
“한 달에 130만원 준다고 해서. 월급 받으려고 시작했어요. 그리고 노래할 수 있어서. 처음 제 역할은 앙상블 1번이었어요. 극단에서 앙상블 1번 해도 괜찮겠냐고 묻기에 서류에 적힌 월급만 꼬박꼬박 나오면 된다고 했더니 웃더라고요.”
그녀는 앙상블이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뮤지컬에서 앙상블은 엑스트라를 가리키는 용어다. 어느 날 구석에서 열심히 사자탈을 닦고 있는데, 극단 대표가 그녀 이름을 불렀다. 방송국에서 연습 장면을 녹화하러 오는데, 신인이 연기하는 모습을 참신하게 넣자며 원숭이 라피키 역할을 즉석에서 해보라고 했다. 카리스마가 필요한 연기와 노래를 10여분 만에 소화해낸 차지연은 그렇게 라이온 킹의 배역을 따냈다.
이후 뮤지컬 무대가 줄줄이 찾아왔다. 마리아 마리아, 드림걸즈, 선덕여왕, 몬테크리스토, 그리고 뮤지컬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서편제까지.
“진짜 앞만 보고 달렸어요. 한 작품 한 작품 만날 때마다 이걸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매일 혼자 연습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어요. 마음에 여유도 없었어요. 엄마는 아파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으셨고, 숨 돌릴 만하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내 인생은 왜 이래, 생각한 적도 많아요. 하지만 계속 뮤지컬 하면서, (하광훈) 선생님 만나면서, 또 무슨 문제가 빵 터지면 저번에도 해냈는데 이번에도 할 수 있겠지, 웃을 수 있게 됐죠.”
반 지하 월세방 탈출한 게 불과 2년 전이다. 이삿짐 업체 부를 돈이 아까워 직접 짐 싸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억척스럽게도 살았다. 올 들어 형편이 좀 편 덕에 전셋집을 마련했다.
‘그대는 어디에’ 뮤직비디오 얘기를 하광훈이 꺼냈다.
“커다란 극장, 텅 빈 무대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는 장면이 있었어요. 감독이 지연이한테 ‘절대 울지는 말고, 울기 직전까지만 갑시다’ 했어요. 이 장면이 한 방에 끝났어요. 감독이 ‘컷’ 하니까 그제야 지연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주룩 내려왔죠. 이 친구, 그런 감정을 노래에도 담을 줄 알아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차지연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란 말을 여러 번 했다. 오래 기다린 것일수록 정작 눈앞에 다가오면 믿기지 않는 법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기다렸는데, 가수가 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어떤 가수가 되려나.
“저는 우리 음악 하는 집에서 태어났잖아요. 뮤지컬 서편제하면서 많이 느꼈는데 우리 소리는 정말 듣는 사람 심장을 찢어놓더라고요. 갈기갈기. 그렇게 노래하고 싶어요. 노래 잘 부르는 가수 말고, 말하는 가수가 되려고요. 다 토해서 내 얘기하는 가수.”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