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시] 레오 톨스토이의 무덤 앞에서
입력 2011-06-16 17:42
서정주(1915∼2000)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무덤을 찾어갔더니
이분 사진의 수염처럼
더부룩한 잡초만 자욱할 뿐,
나무로 깍어 세운 碑木 하나도 보이지는 않습디다.
2백5십만 마지기의 땅을
농민들에게 모조리 그저 노나주고
자기는 손바닥만한 碑石 하나도 없이
풀들과 새, 나비들과 바람와 하늘하고만 짝해서 누웠습디다.
‘참 잘했다 영감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선 그래도 울려옵디다.
미당(未堂) 서정주는 작고하기 10년 전인 1990년 5∼6월, 그리고 92년 7∼8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찾았다. 이 시를 비롯해 그가 남긴 10편의 러시아 시편은 러시아 방문에 따른 소출이다.
생전의 미당은 1931년 겨울, 전북 줄포의 아버지 집 서랍 속에 있는 돈 1만원 가운데 300원만을 몰래 훔쳐내 중국 상하이나 만주로 가기로 작정하고 상경했다가 우연히 만난 서울 중앙학교 동창생 집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털어놓았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관에서 내가 또 읽은 것들 중에, 내 이 뒤의 생애를 좌우하는 데 제일 큰 힘이 되었던 건 레오 톨스토이 백작의 ‘부활’이다.”(미당자서전 2권)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92년, 톨스토이 생가인 야스나야 폴랴나를 찾아가 초라한 무덤을 본 감회는 남다른 것이었으리라. 가출 8개월 만인 32년 6월, 책만 한 고리짝을 사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를 뵐 용기를 얻었던 것도 톨스토이를 읽고 문학청년이 되려고 결심한 연후의 일이다. 언젠가 눈 밝은 문학사가들이 미당 문학에 대한 재조명 작업에 착수할 때 미당과 톨스토이의 상관관계를 파헤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