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家 수상한 그림 사랑… 갤러리-재벌, 그림 거래 어떻기에

입력 2011-06-16 17:36


2008년 2월 1일. 서울 청담동 서미갤러리의 홍송원 대표가 미국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을 공개했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심부름으로 홍 대표가 구입해 한동안 이건희 회장 자택에 걸려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작품이었다.

홍 대표는 “‘행복한 눈물’은 200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80만 달러에 낙찰받은 것으로 홍 관장의 소유가 아니다”고 해명했다. 150억원을 호가한 이 작품은 홍 관장 소장품으로 알려졌으나 삼성 비자금 파문이 불거지면서 홍 대표가 이른바 ‘총대’를 멨다는 얘기가 미술계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특검 수사 결과 ‘행복한 눈물’의 주인은 홍 관장이 아니라 홍 대표라는 결론이 났고, 삼성 비자금으로 홍 관장 등이 수백억원대의 고가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도 무혐의 처리됐다. 미술품 구입 대금은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이라는 것이다.

당시 특검에 따르면 홍 대표가 그림 구입을 권유하기 위해 ‘행복한 눈물’을 홍 관장 집에 두 차례 보냈다. 이후 홍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 관장은 마음에 들어 했지만 이재용 사장이 만화 같은 그림을 700만 달러나 주고 왜 사느냐고 반대해 못 팔았다”고 했다. 이 작품은 홍 대표가 나중에 미국 측에 300억원에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부터 3년 4개월여의 세월이 흐른 2011년 6월 7일. 홍 대표가 홍 관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홍 대표는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 사이 홍 관장에게 판매한 14점의 그림값 781억8000만원 중 531억8000만원을 받지 못했다”며 잔금 가운데 50억원을 우선 변제하라고 주장했다.

홍 관장과 홍 대표의 인연은 1990년대 초 서미갤러리에서 열린 미국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전시를 홍 관장이 관람하면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홍 대표는 홍 관장에게 리히터, 크리스토, 마크 로스코 등의 작품을 팔았으며 총 판매대금은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홍 관장의 그림 구입을 주선하면서 ‘홍 관장의 사람’이라느니, ‘미술계 홍·홍 투톱’으로 불리며 실력을 행사하던 홍 대표가 갑자기 소송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홍 대표가 오리온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자 홍 관장을 물고 늘어지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림과 재벌의 커넥션을 읽을 수 있다.

홍 대표가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한 14점의 그림목록 중 대표작은 미국 작가 빌럼 데 쿠닝의 ‘무제 Ⅵ’(1975년 작·313억원), 영국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이를 데리고 가는 남자’(1956년 작·216억원), 역시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황소의 머리’(2009년 작·64억5000만원) 등이다.

홍 대표가 홍 관장에게 판매했다고 주장하는 이들 작품의 가격은 실제보다 수십배 부풀려졌다는 게 미술계 시각이다. 한 미술품 경매회사 관계자는 “쿠닝의 ‘무제 Ⅵ’ 같은 경우 2000년 경매 낙찰가에 비해 23배 높은 가격이고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검찰 주변과 미술계에서는 홍 대표와 홍 관장이 미술품 가격을 부풀려 거래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정이 나오고 있다. 미술품 판매 가격을 부풀려 적은 뒤 차액을 돌려주는 수법으로 삼성가의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동안 홍 관장의 거래 관행에 비춰볼 때 외상으로 하거나 잔금을 치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홍 관장이 작품 구입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홍 대표가 ‘그림을 먼저 걸어놓고 나중에 돈을 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삼성 측에서는 “홍 대표가 그림을 팔았다고 주장하는 2009년 8월 이후는 삼성특검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어떻게 그림을 비싸게 사서 비자금을 조성하겠느냐”며 “삼성미술관은 외국 화랑과 거래를 통해 70% 가격에 작품을 직접 사왔다”고 비공식적으로 해명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사실은 초고가의 미술품 가격은 거래 기관과 당사자, 거래 시기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날 수 있고, 베일에 가려진 그림 매매가 일부 재벌의 비자금 조성이나 각종 뇌물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3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유용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로 최근 검찰에 구속됐다. 횡령액 가운데 140억원은 담 회장이 미술품 10점을 법인자금으로 구입해 개인적으로 소장한 혐의다.

담 회장 자택에는 프란츠 클라인의 ‘페인팅 11’(55억원),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28억원), 데미안 허스트의 설치작품(20억원) 등이 있는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작품들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오리온 등 계열사 4곳의 자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거래를 주선한 곳은 서미갤러리였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로비 파문을 일으킨 최욱경의 ‘학동마을’도 서미갤러리 소유로 드러나는 등 미술품과 관련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홍 대표의 이름이 빠짐없이 오르내린다. “재벌 소장품 대부분을 홍 대표가 사줬고, 10∼50배씩 올랐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는다.

홍 대표는 홍 관장 외에도 이명희 신세계 회장, 오리온그룹 이화경 사장 등 재벌 안방마님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전시를 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그림을 파는 홍 대표의 화랑 운영 방식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조용히 사서 혼자 즐기고 싶은 재벌 여주인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전국 80여개의 사립미술관 가운데 제대로 운영되는 곳은 재벌 미술관들로 대부분 재벌가 여성들이 관장직을 맡고 있다.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은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 박강자 금호미술관장은 고(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여동생, 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은 SK 최태원 회장의 부인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갤러리 대표들은 이들 재벌 미술관장과 손을 잡기 위해 혈안이다. 관계가 맺어지면 화랑 매출은 물론이고 이미지도 수직 상승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 화상(畵商)을 두고 미술계에서는 “재벌 집에서 김장까지 해주며 신뢰를 쌓아 자녀 혼수 문제를 맡아서 하는 ‘집사’ 수준까지 올랐다”고 수군거릴 정도다.

그렇다면 유명 기업들은 왜 미술품 컬렉션에 그토록 목을 매는 걸까.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의 경우 작품값도 만만찮고 손에 넣기도 힘든데 기업들이 앞다퉈 컬렉션에 열을 올리는 것은 여러 가지 반사이익이 있어서다. 무엇보다 10∼20년이 지나면 엄청난 수익이 보장되는 게 아트 컬렉션의 매력이다. 게다가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기업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투자도 되고, 평판도 좋아지니 그야말로 ‘남는 장사’인 셈이다.

국내 재벌들이 미술품 관련 탈세·탈루 의혹을 자주 받는 이유는 이들이 무슨 그림을 얼마에 사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세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술품이 ‘기업의 탈세·로비 수단’이라는 인식과 함께 화랑이 ‘비자금 세탁처’라는 오명마저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2013년 이후 작품가액 6000만원 이상인 작고 작가의 작품을 팔아 이익이 남으면 세금을 매기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부담이 없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그림은 소유 확인 및 가격 평가가 어려워 현실적으로 과세가 힘들다”고 말했다. 10억짜리 그림을 사더라도 1억에 샀다고 하면 그만이고, 재산신고 때 누락시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 미술관이 크게 위축되고,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이 이어지며 시선이 곱지 않자 재벌의 미술관 운영은 다분히 폐쇄적으로 바뀌었다. 미술품 수집은 내밀한 거래로 진행되고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게 대세가 됐다.

일각에는 재벌 미술관들이 기업의 사회환원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작품을 상속수단으로 여긴다는 등의 비판도 적지 않다. 문화재단을 만들어 미술관을 설립하면 세금면제, 로또문화기금 수혜 등을 받으면서 공적인 요소가 커지지만 많은 미술관이 여전히 사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외국 사립미술관은 매년 연례보고서와 도록을 발간해 구매 내역을 알리는 데 반해 국내에는 이런 것이 거의 없다”면서 “전시 등을 통해 최소한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간 50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미술시장에서 걷히는 한 해 총 세금은 30억원 정도다. 법인체인 경매회사나 갤러리의 경우 매출액에 따라 11∼18%, 작가는 원천징수 3.3%와 거래액에 따른 소득세를 낸다. 하지만 갤러리의 미술품 매매가는 신고액과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대다수 갤러리들은 기획전시와 작가 발굴 등을 위해 애쓰는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전체 화랑의 이미지를 흐려놓는다며 볼멘소리다. 한국화랑협회의 한 관계자는 “서미갤러리의 불법성이 드러나면 협회에서 제명시킬 방침”이라며 “‘그림값은 검은돈’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도록 투명한 거래 등 자정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