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무제 96번
입력 2011-06-16 17:37
지난 5월 크리스티는 뉴욕 경매에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전후 현대 예술 작품 경매에서, 출품작 중 단 3점을 뺀 모든 작품이 낙찰되며 무려 3억 달러라는 근래 없는 기록을 세웠다.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프랜시스 베이컨 등 화려한 작가들의 작품이 총출동한 이날 경매 최고가는 최근 경매량과 경매가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는 앤디 워홀이 차지했다. 그의 ‘자화상’은 약 3850만 달러에 낙찰됐다. 우리 돈 400억원이 조금 넘는다.
이날 경매의 또 다른 이변은 신디 셔먼의 사진 작품 ‘무제 96번’이다. 애초 예상액의 두 배를 뛰어넘는 약 39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며, 무려 4년의 공백을 깨고 사진작품 최고가를 경신했다. 물리적 숫자로만 보자면 앤디 워홀 작품 값의 10분의 1이지만, 그동안 1위를 차지했던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작품과는 아주 다른 성향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작품 설치차 방한하기도 했던 신디 셔먼은 1970년대 이후 줄곧 여성과 몸에 대한 주제를 탐색해 온 작가로 유명하다. 1970년대 말 B급 영화의 여주인공 모습으로 스스로 분장한 뒤 촬영한 시리즈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며 이름을 굳혔다. ‘영화 스틸컷 무제’라는 이 파격적인 패러디는 권태롭거나 나른한 혹은 외로운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B급 영화로 상징되는, 여성의 상품화되고 상투적인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여성의 욕망과 정체성을 진지하게 탐색했다. 실제 영화의 스틸컷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세련된 분장과 연출은 시각적 재미를 더하며 도발적 문제 제기에 설득력을 높였다. 스스로 작가이자 피사체가 됨으로써 피사체는 카메라 앞에서 늘 수동적이며, 관음적 특권을 누리는 카메라는 폭력적이라는 설정 자체도 허물어버렸다.
이번에 낙찰된 작품은 이 첫 번째 연작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흑백인 ‘영화 스틸컷 무제’와 달리 컬러 작업이다. 본래 1981년 미국의 유명한 예술잡지 ‘아트포럼’이 기사로 싣기 위해 신디 셔먼에게 촬영을 부탁했으나, 유혹하는 듯한 혹은 상처받은 듯한 묘한 분위기의 이 사진은 정작 ‘아트포럼’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파리 패션쇼가 우리 한철 복장에는 치명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패션계를 흔들어 놓듯, 경매 낙찰가 또한 작품의 질적 순위와 비례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무제 96번’이 미국 화랑가의 스타 딜러에게 팔렸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m짜리 한 점을 40억원에 낙찰 받은 필립 세갈로트는 크리스티에서 현대예술 부문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제프 쿤스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의 작가를 스타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포르노 작가를 자처하며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와 결혼했을 만큼 돌출 행동으로 악명 높은 제프 쿤스가 미술시장에서 계속 상승세를 타는 이유는 미국의 스타 만들기 덕이라는 곱지 않는 시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 10점 중 7점은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들 작품이다. ‘무제 96번’의 최고가 낙찰이 해석의 여지가 깊은 작업에 대한 미술시장의 갈망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송수정 <사진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