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6-16 18:00


독일 종교개혁의 전개과정(2) - 루터 “최고 권위는 성서” 파문당해

1518∼21년 다시 2차 시편 강해를 하였는데, 복음주의적 시각에서 강의하였다. 1518년 4월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천주교 신학은 영광의 신학이고, 자신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임을 해석하는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하였다. 1518년 천주교 추기경 카제탄과의 인터뷰를 삭소니 선제후(황제를 선거하는 제후)인 프레데릭 4세가 주선하였다. 루터는 크리스천 신앙은 구원의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1518년 11월 28일 카제탄과의 대화 이후 즉시 교회회의에서 재판받기를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1519년 7월 천주교 신학자 존 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이 있었다. 루터는 교회의 최고 권위는 교황의 말씀이나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임을 강조하였다. 교황무오설에 감히 도전하여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520년 6월 15일 루터의 파문을 위협하는 교황의 칙서(Exerge Domine)가 왔다. 루터를 정죄하는 과정이 에크와 카제탄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었다.

1520년 루터는 그 유명한 3대 논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기독자의 자유’ 등을 썼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의 정죄선언을 받았을 때 그는 유명한 최후진술 “하나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Here I stand, help me, God!)”를 남겼으며, 결국 로마천주교회로부터 파문당하게 되었다.

1521∼22년 그는 프레데릭 4세의 도움으로 기사의 옷을 입고 수염도 깎지 않고 기사의 이름(게오르규)으로 숨어서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희랍어에서 독일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524년에 에라스무스가 그의 저술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통해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적 책임성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루터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공격하였다. 루터는 1525년 노예의지론을 써서 의지의 무력과 은총의 위대하심을 강조함으로써 인문주의 운동과 완전히 이별하게 되었다.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전에 수녀였던 카타리나 본 보라와 결혼한 후 더욱 힘을 얻어 담대하게 종교개혁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루터가 수도사와 수녀들을 짝짓게 해주었으나 마지막에 한 명 남은 수녀 카타리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1546년 멘스펠드 백작들의 법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 아이스레벤에 갔다가 만 63세에 사망하게 되었다.

1546∼47년에는 찰스 5세가 군대의 힘으로 독일의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슈말칼드 동맹이 이에 저항함으로써 슈말칼드 전쟁이 일어났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황제가 개신교면 그 국가는 개신교, 황제가 가톨릭이면 그 국가는 가톨릭으로 정하는 “그 지역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가 결정한다(cuis regio, eius religio)”를 결의하였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으로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그 후로 중세 로마교황청은 더 이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홍기 총장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