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위로가 되다… 부산 ‘바나나롱 갤러리’와 강문주 관장

입력 2011-06-16 17:36


어릴 적 멀리서 밤 기차 지나갈 때면 첫사랑처럼 설레었다. 어둠 사이로 검고 긴 물체가 굉음을 내며 달리고, 객실 창문에선 흰 불빛이 점점이 삐져나와 긴 은하수를 이뤘다. 어떤 이들이 타는지,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은 왜 낮이 아닌 밤 기차에 몸을 싣는지 문득 궁금했다. 차창 속 여자는 커다란 가방을 품에 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거야, 생각했다. ‘땡강땡강’ 건널목 경적이 울리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기찻길 앞에 멈추고 기차만 쌩, 바람을 몰고 지나갔다. 그럼 정적만, 나만 남았다.

기찻길은 그런 곳이다. 가난한 이들이 허름한 집을 짓고 사는 곳, 떠나는 자와 남은 자가 스치는 곳, 일상과 일탈이 만나는 곳,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곳. 이 길에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하늘은 잿빛이고, 철길은 녹슬었는데 미술관만 홀로 노랗다. 부산 해운대 백사장이 끝나는 거기서, 지난 13일 ‘바나나롱 갤러리’를 만났다. 동화책 ‘톰 소여의 모험’에서 본 듯한 오두막집 앞에 섰다.

‘바나나롱 갤러리’란 이름은 노랫말에서 따왔다. ‘바나나는 길어, 긴 건 기차, 기차는 빨라….’ 14평 조그만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듬성듬성, 그림이 드문드문 있다. 벽도, 가구도 껍질 벗긴 바나나처럼 노란 빛 도는 하얀색 목재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강아지 ‘콜라’가 산다. 이 누렁이는 한쪽 구석에서 야구공을 두 발로 잡은 채 궁둥이를 뒤로 빼고 바닥에 누워 졸고 있었다. 갤러리 관장은 음악을 틀었고, 큐레이터는 커피를 만들었다. 관람객이 한명 들어서니 공간이 꽉 차버렸다.

관장은 자신을 바나나씨(39), 큐레이터를 바나나양(25), 개를 바나나군(9)이라고 소개했다. 애칭이란다. 수컷인 콜라만 빼면 모두 여자다. 바나나씨는 벽에 걸린 작품 얘기를 들려줬다. 하루 전에 끝난 ‘엄마, 백원만’ 전시회의 김선영(33) 작가 그림들이다. 생선 냄새 고약하다며 빨래집게로 코끝을 집은 철없는 아이와 코믹하게 생긴 야채가게 아저씨를 소개하다가 바나나씨는 ‘큭큭’ 웃었다. 아저씨 팔뚝에 그려진 용 문신을 가리키며 예전에 검은 세계에 몸담았던 분 같다면서. ‘크크크’ 같이 웃었다. 그림 속 아저씨도 우릴 따라 웃었다.

순간 기차가 미술관 옆을 지나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이게 아니라 ‘부왕∼∼’ 화내듯 달리자 집이 부들부들 떨린다. 재개발 지역의 무허가 흙집에 목재를 덧댄 공간이라 떨림이 심했다. “텐트에서 사는 것 같아요. 여긴 바람도 심하고, 안개도 많이 끼고. 재밌지 않아요?” 바나나씨가 말했다.

‘물이 뚝뚝뚝. 입을 쩍 벌리고 저걸 생선이라 부르지. 비누로 빡빡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비린내. 내가 아는 누구의 겨드랑이 같은 냄새. 통통통 통통. 생선가게 아저씨 현란한 칼놀림. 뎅강뎅강.’

김 작가는 부산 부전시장(서울로 치면 남대문시장쯤 된다)에서 본 시장의 일상을 그림과 글로 이렇게 표현했다. 어려서 식당 하는 엄마 따라 새벽시장 다녔던 작가는 커서도 시장통 헤매며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중앙에는 기다란 책상과 의자가 있다. 바나나씨가 직접 아이보리색 페인트칠을 했다가 다시 벗겨낸 빈티지풍의 가구. 비 오면 비가 온다, 눈 오면 눈이 온다, 크리스마스엔 이유 없이 기분 좋다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관람객 얘기에 일일이 댓글을 다는 바나나씨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름은 강문주. 심리치료사이자 작가이고, 갤러리 관장이다.

-심리치료사로 일하다 갤러리를 열었네요.

“스물여섯에 몸이 아파서 잠시 일을 쉬다가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후에 자연스럽게 작가로 나서게 됐고요. 3년 전에 설치작품을 만들었는데, 작품명이 ‘새장’이라고, 사람이란 존재가 이런 거다, 하는 세계관을 표현한 거였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새장에 들어가서 우는 사람, 커튼을 쳐 달라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크로 된 천을 덮어 드렸어요. 아, 심리치료사로 10년쯤 일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사람을 위로하는 습관이 작품에 흐른다고 느꼈어요. 비가 새지 않고, 여러 명 들어갈 수 있는 이런 공간을 하나 더 만들자 싶었죠. 그해 겨울부터 공사를 시작했어요. 잘 알고 지내는 건축가(5만원권 화폐의 신사임당을 그린 이종상 화백의 외조카다)께서 거의 재료비만 받고 고친 집이에요. 그러니까 이 갤러리는 제 작품인 ‘새장-2’이고, 또 저는 심리치료를 하고 있는 거죠.”

-기찻길을 좋아하세요?

“여기가 참 묘해요. 언덕이 굽어 내려오는 곳이고, 바다가 시작되고 땅이 끝나는 곳이고, 철길이고. 길 한 가운데 일단 멈춤,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는 공간이 갤러리인데 딱 그런 장소잖아요. 여긴 여행지라 사람들이 다 느긋하게 걸어 다니고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그네 타고 왔다갔다하는데 늘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사람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시간이 그 밑을 흐르는지도 몰라요. 그런 게 기찻길과 닮았죠. ‘흠∼’ 이렇게 한숨 한번 쉬고는 작더라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뭔지 찾는 공간, 그게 갤러리라고 생각해요.”

-작품이 대부분 밝아요.

“부정적인 건 전시 안 해요. 보통 대안공간에서 많이 전시하는 기형적이고 뒤틀린 이미지, 예를 들면 내장 같은 건 이곳과 맞지 않아요. 한번은 작가가 잘린 팔을 그렸는데 그건 ‘예스’ 했어요. 그건 자기 트라우마고, 그걸 드러냄으로써 사람이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는 거니까요. 사람이 있잖아요, 아이스크림 한입을 딱 먹었는데, 아니면 정말 향기 좋은 커피를 한입 마셨는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해요. 논리가 아닌 감각, 이미지로도 위로를 받거든요.”

-관람객 반응은 어때요?

“해운대 버스 대부분이 여기를 지나가는데 기사분들도 차창 너머로 이곳을 물끄러미 보세요. 철길에서 일하시는 역무원 아저씨들도 놀러 오고요. 격식 차리지 않고 슬리퍼 신고 올 수 있는 동네 공간이니까. 저 사람이 물건 살까, 안 살까, 우리 공간을 침범하나, 안 하나 생각하면 그런 공간이 되겠죠. 하지만 여기선 여행객이 반갑고, 무슨 일로 들렀나 싶고 그래요. 참, 셀카만 찍는 분은 사양해요. 원래 관람료가 공짜였는데 가격을 5000원으로 올렸어요. 6, 7명이면 꽉 차는 공간에 너무 많이 몰려와서 관람이 제대로 안 됐거든요. 그런데 가격을 높인다고 관람 태도나 질이 올라가는 건 아니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이죠.”

-많은 사람을 만나겠네요.

“이 공간이 사람들을 연결해줘요. 우클렐레 동호회 회원이나 대금 연주하는 분이 들렀다 무척 좋아하시면서 미니 콘서트도 열어주셨고요. 사진작가 이홍석(2007년 ‘내셔널지오그래픽’ 국제사진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씨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지나가다 인연을 맺었어요. 이 작가가 부전시장 다방에서 열린 기획전과 2주년 기념전시회에도 작품을 전시했어요. 임책상(본명은 임은빈. 책상에 앉아야만 뭐든 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씨는 블로그 통해서 만났어요. 헝가리에서 유학하는 분인데 매번 자기 방에 다른 작품을 설치해서 블로그에 올리세요. ‘방 갤러리’ 개념이죠. 그분이랑은 ‘원격 전시’를 했어요. 설치작품 재료를 헝가리에서 부치면 그분 의도에 맞게 우리가 전시하고, 인터넷 통해 소통하고. 임책상씨는 최근 한국 들어와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어요.”

2시간 가까이 머무는 동안 기차는 세 번 지나갔고, 콜라는 한 번 짖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자전거 탄 아저씨, 배낭 멘 아저씨들은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갤러리 안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갤러리만 빼고 주위 집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국유지에 세워진 무허가 건물인데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주인은 있다. 바나나씨는 임대해서 이곳에 들어왔고, 언제 폐관될지 알 수 없다. 그는 “인생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갤러리도 어느 때인가 그냥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갤러리를 나섰다. 우리는 해운대 청사포로 옮겨 바닷가 앞 조개구이집에 갔다. 하늘이 흐리니까, 바다도 검푸르다. 바나나씨는 직업 얘기를 들려줬다. 7년째 성폭력, 가정폭력 시설에서 상담하는데 때론 상담이 자기에게도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앞에선 울지 않지만 성폭력 당한 청소년들 사연에 상담사의 마음도 할퀴어진다. 그래도 그 일을 하는 건, 사람이 밝아지고 나아진다는 게 기뻐서라고 한다. 일상 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누렁이 콜라와 함께 갤러리에 출근하고, 여름날엔 바닷가에서 콜라와 수영을 하고, 종종 철길에서 야구공 던지기 놀이도 한다.

시간에 쫓겨 주문한 장어와 조개구이를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섰다. 밤 10시30분 서울행 마지막 KTX를 탔다. 바나나씨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비 오는 날에 다시 만나요.’

‘그래요, 비 오는 어느 날.’

부산=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