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물건, 우리를 가난하게 하다

입력 2011-06-16 17:58


가격 파괴의 저주/고든 레어드/민음사

이야기는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새벽 5시, 미국 뉴욕주 월마트 앞에서 시작된다. 금융위기가 강타한 해였다. 34살의 월마트 안전요원은 개장과 함께 밀려든 쇼핑객들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같은 시간 캘리포니아주 완구매장에서는 장난감을 놓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지갑은 얇아졌으나 소비는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의 소비자들은 대형마트의 할인 이벤트에 목숨을 걸었다.

월마트 사건은 다가올 비극적 사건의 전조로 회자됐다. 빚을 내서라도 더 싼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것이 미덕인 소비경제. 저가상품이 허락하는 싼값의 풍요를 누려온 할인경제는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그날 월마트 매장에서 압사했다. 플라스틱 상어와 봉제인형, 침대시트를 반값에 월마트 매대에 올려놓았던 세계경제의 물적 토대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할인, 계속되기엔 너무 좋은?

1990년대 이래 모든 건 기적적으로 싸졌다. 2006년 미 소비자물가는 1985년보다 3% 이상 떨어졌다. 중심에는 ‘최저가’를 기업 DNA로 삼아온 월마트가 있었다. 월마트가 구축한 ‘싼값의 풍요’는 규모로 짐작 가능하다. 2008년 월마트의 연 수익(4050억 달러)은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다. 금융위기로 다른 소매업체가 휘청거릴 때 월마트는 홀로 웃었다. 백화점 시어스 등의 매출이 20∼30%씩 곤두박질친 2009년에도 월마트는 5% 이상 성장했다.

그러나 월마트의 방식에는 함정이 있었다. 월마트 수익률은 1달러 당 3.24센트. 다른 기업과 비교해 턱없이 낮다. 생존하려면 더 싸게 더 많이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할인과 성장의 페달이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쓰러지게 된다.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라는 건 월마트 할인경제의 치명적 약점이었다. 소비 지상주의의 황금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고작 10여년. 월마트가 주도한 할인파티는 놀라울 만큼 짧았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고든 레어드는 이 책 ‘가격 파괴의 저주’에서 월마트가 이끌었던 할인경제의 마지막을 관찰한다. 월마트 압사 사건이 그랬듯 파티의 마지막은 격렬했다.

플라스틱 경제의 끝

왜 모든 좋은 것에는 끝이 있는지. 왜 싼 공산품의 시대가 종말을 고해야 하는지. 이제 답을 찾을 차례다. 만약 가격 하락이 기술개발의 효과라면 값은 계속 떨어져야 마땅하다. 1000만원에 육박하던 3D TV 가격이 100만원 안팎까지 하락했듯 과학은 값을 끌어내리는 힘이 있다. 그러나 월마트발(發) 할인 경쟁은 기술의 덕이 아니었다. 쓰고 버려진 저가 상품은 세계화 시스템의 산물이었다. 싼 에너지와 개발도상국의 저임금 노동력, 지구적 차원의 물류 인프라가 동력이었다. 먼저 석유. 이게 고갈 직전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저자는 섣불리 석유의 종말을 예측하지 않았지만 원유를 ‘채굴’하는 대신 ‘생산’해야 하는 시대의 암울함을 말한다. 캐나다의 타르 샌드 광산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비용은 배럴당 30달러. 싼 에너지의 시대는 영원히 끝이 난 것이다. 비싼 석유가 물류비용 증가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석유에서 추출한 에틸렌은 21세기 문명의 기초재료. 비닐봉지부터 요쿠르트병, LCD 스크린, 의수족, 의약품, 플라스틱 샴푸병까지 에틸린은 빠지는 데가 없다.

세계의 공장 중국도 변하고 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지친 중국 노동자들은 슬슬 항의시위를 하고 파업을 벌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2008년 중국의 노동비용은 평균 9%나 인상됐다. 저자는 말한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값싼 물건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중국은 소비자가 되고 싶어 한다.”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가 후발주자로 대기하고 있지만, 13억 중국의 공백을 메우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다시 둥근 지구로

만약 월마트의 할인 상품이 구매력을 높여 미국을 부유하게 했다면 물건이 싸지 않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싼 물건은 가난을 부추겼다. 정규직 일자리는 오래 전에 공장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워싱턴 경제정책연구소는 2003∼2006년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일자리 180만개를 없앴다고 주장한다. 자영업자도 몰락했다. 이마트 피자가 동네 피자가게를 문 닫게 했듯 대형마트의 할인 공세는 동네의 소규모 가게를 폐업시켰다. 이제 본토에 남은 일자리는 할인마트 판매원뿐이다.

가난해진 소비자는 더 값싼 물건을 찾는다. 값싼 물건을 지탱해줄 경제는 거꾸로 고용불안을 부추긴다. 세계화 시대, 할인경제의 악순환이다.

그래서 가격 파괴의 시대가 가고 있는 게 반드시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상품이 진짜 가격표를 찾을 때 싼 물건이 저임금을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난한 소비자와 비싼 물건’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탄생할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평평한 세계’가 가고 ‘둥근 지구’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한다. 지역기업이 지역에 일자리를 만들고 동네 소비자가 제값에 동네의 물건을 사는 경제. 우리는 다시 둥근 지구에 적응할 준비가 됐는가. 박병수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