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떠났지만 시의 울림은 계속된다… 고정희 시인 20주기 시선집 출간

입력 2011-06-15 18:01


“연희동에 13평 전세아파트를 계약하고/길일을 따져 이삿날을 잡았습니다./그런데 친구여/나는 수유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계약금을 날리고/아파트의 자유를 날려버리면서도/나는 수유리의 흡인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개인주택 지하 1층에 살면서/에프엠 수신이 불가능하다 해도/하루 세 시간씩 출퇴근길에 파김치로 흔들린다 해도/수유리에 묻는 내 꿈을 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고정희 ‘다시 수유리에서’ 일부)

고정희(1948∼91)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시선집(전2권·도서출판 또하나의문화)이 출간되었다. 시인을 추모하는 독자 중심으로 232명의 개인과 단체의 기부 릴레이를 통해 마련한 비용으로 발간된 시선집은 고인이 남긴 11권의 시집 대부분이 절판 상태인 것을 감안할 때 문학적 복원의 의미를 지닌다. 기부 릴레이에 동참한 사람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고정희 시인과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젊은 날 한때,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를 무척 좋아하여 일기장에다 적어두고 수백 번 읊조렸으니, 마음으로는 수백 번 만난 사이랍니다.”(박정애)

“고3 때 단순히 백일장이 좋아서 고정희청소년문학상에 참여해 해남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 일은 저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여성 의식을 연구한 졸업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시를 읽고 공부하는 그 과정이 참 행복했습니다.”(이은선)

“사춘기 시절 예민하고 괴롭고 힘들 때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지해 주신 국어 선생님이 계십니다. 막 대학생이 된 제게 선생님께서 사 주신 책들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제 20년이 흘러서 제가 선생님께 ‘고정희 시선집’을 선물하고 싶습니다.”(강솔)

고정희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지만 그가 치열하게 사회의식을 바투었던 문학적 고향은 서울 수유리다. 그가 다닌 한국신학대학이 자리 잡고 있던 수유리는 기독교의 해방적 부분과 4·19묘지의 저항성이 일치된 곳이다. 한신대와 4·19묘지 지척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남긴 많은 기독교적 바탕의 시가 찬양 일변도나 예배 문학으로 빠지지 않고 인간해방문학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중략)//너의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너의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이 시대의 아벨’ 일부)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무고한 아벨을 죽인 어둠의 시대로 인식하였다. 가인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아우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물음과 질타를 고정희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냈던 것이다. 우리가 저버린 아벨은 누구인가. 아벨은 바로 억압받는 민중이며 억울하게 숨져간 광주의 원혼들이었다.

시인은 91년 6월 9일 소낙비가 퍼붓는 날씨임에도, 지리산 산행을 감행하다가 뱀사골에서 실족사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의 시는 6월의 신록처럼 푸르게 남아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일부)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