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공보관 임상규

입력 2011-06-15 17:48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덫’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또 한 사람의 고위공직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상규 순천대 총장(전 농림부 장관)이 지난 13일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차량 조수석에 화덕이 놓여 있었고,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른바 ‘함바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괴로워하다 자살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13년 전인 1998년,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내가 기획예산위원회를 출입할 당시 그는 총무과장이었다. 대개의 공직자들이 기자들을 불편해하고 낯을 가렸던 것과는 달리 친화력이 좋았던 그는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어느 날 그가 몇몇 고참기자들에게 내밀한 제안을 했다. ‘공보관을 하고 싶은데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보관이 되려면 기자실의 내락(?)이 아주 중요했다. 희망대로 그는 공보관이 됐고, 아주 열심히 했다.

그의 접대 품목 1호인 흑산도 홍어 파티도 자주 열었고, 기자들을 위한 이런저런 모임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8개월여의 짧은 공보관을 마치고 경제예산심의관으로 옮긴 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예산실장, 과기부 차관을 거쳐 마침내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공보관을 그만둔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기획예산처(99년 5월 명칭 변경)를 떠났다. 이후에는 어쩌다 한 번씩 통화하는 것 이외 각별한 교유가 없었던 터라 그는 내게 여전히 ‘공보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그가 죽음으로 내게 소식을 전했다. ‘악마의 덫에 걸려 헤어나올 수 없다’는 단말마의 절규를 세상에 토해놓고 떠났다.

그가 말한 ‘악마의 덫’은 98년 함바 비리의 핵심인 유상봉씨에게 지인들을 소개시켜 줌으로써 맺게 된 ‘악연’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변에 워낙 사람이 많았던 그였기에 당시에는 별 뜻 없이 접촉했을 것이다. 그때의 ‘사소한’ 만남이 결국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공직자와 업자의 관계가 오래되고 깊을수록 빠져나오는 길은 없다는 것을 그는 죽음으로 입증했다. 이들의 만남이 진흙탕에 빠지는 것은 순간이다. 처음에는 친구의 친구 내지 선후배, 또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점심을 한다. 다음 만남에는 술자리가 만들어지고, 이어 골프를 함께 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 덧 소개했던 친구나 지인은 사라지고 둘만의 대면이 이뤄진다. ‘덫’이 놓이는 순간이다.

그는 이제 ‘악마의 덫’에서 벗어났지만 그 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본보 14일자 1면 보도를 보면 그 덫은 갈수록 생명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한국행정연구원이 전국의 기업인과 자영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한 결과, 공직자들의 부패가 지난 10년 동안 전혀 줄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2000년 이후 지난해가 가장 심각했다는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또 조선일보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전국의 기초자치단체장 228명 중 20%가 ‘돈봉투를 들고 온 사람이 있었다’고 밝혔다. 경기도 성남과 하남시장, 서울 구로 및 서초구청장 등 12명의 단체장들은 현금 전달 시도를 막기 위해 집무실 또는 집무실 입구 비서실에 CCTV를 달았다. 집무실에 마이크를 설치해 비서실 스피커로 들리도록 하거나 시장 집무실에 기록전담 공무원을 상주시켜 모든 사람들의 면담 내용을 기록하게 하는 자치단체장도 있다.

공직자들과 끈을 이으려는 업자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이를 막으려는 곧은 공직자들의 노력이 얼마나 가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임 총장의 죽음은 가슴 아프지만, 그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의 죽음이 여전히 ‘덫’에 빠져 허우적대는 공직자들에게는 양심을 일깨우고, 그 주변을 맴도는 부나비들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악마’도 없고, ‘덫’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