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장기호·박성식 “팀 이름처럼 살기위해 할 게 많아요”

입력 2011-06-15 17:35


[미션라이프] “누가 빛이고 누가 소금이죠?”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빛 아니면 소금일 두 사람이 되물었다. “누가 빛인 거 같아요.”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손으로 가리키며) ‘빛’이시고, (시선을 돌려 눈을 바라보며) 소금….”

자신 없었다. 그런데…. “정답! 제대로 봤네!” 큰 수수께끼라도 푼 듯 기뻤다. 이유가 걸작이다. “빛은 직진이잖아요. 얘가 직설적으로 말을 쏴대면 소금이 ‘솨악’ 스며들어 분위기를 풀죠.”

하나 더. “얘는 경기도 광명 살고 저는 인천 사니까 얘가 빛, 제가 소금.” 학창시절 숙제하다 훔쳐봤던 수학문제집 해답보다 명쾌했다.

지난 4일 만난 지천명(知天命)의 친구는 익살스러웠다. 티격태격, 재밌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수시로 ‘빵빵’터졌다. 데뷔 20주년을 맞은 그룹 ‘빛과 소금’의 50세 동갑내기 ‘빛’ 장기호와 ‘소금’ 박성식.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교수이자 MBC TV ‘나는가수다’의 근엄한 자문위원단장이 아닌 ‘베이시스트’ 장기호, 호서대 실용음악과 교수가 아닌 ‘만능 음악인’ 박성식. 왕년의 라디오스타 목소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40

친구로 지낸 햇수 벌써 40년. 서울 후암동 해방촌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이들의 쉼터이자 놀이터였다. 가까운 거리에 살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중학교 때 학교가 갈렸지만 방과 후 어두운 해방촌 골목의 두 대장은 바뀌지 않았다.

“빈민촌. 생활고와 싸우며 사는 마을이었죠. 부모 뿐 아니라 자녀도 꿈이 없었어요.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 피우고,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연탄재 던지고…. 그렇게 놀았죠.”

고1 겨울방학, 박씨는 신물이 났다. 고민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되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일찍 철이 든 셈. 철들고 처음 손댄 것, 피아노였다.

“교회에서 피아노 치는 형들이 참 멋있더라고요. 가난한 부모를 졸랐죠. 피아노만 사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가겠다고. 빚으로 산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클래식 음악을 독학했어요.”

그 무렵 장씨는 쿵푸도장에 다녔다. 동네 건달 여럿에게 몰매를 맞았다. 화가 났다. 안 되겠다 싶어 쿵푸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원래 싸움을 잘했다. 싸움실력은 더 늘었다. 그러던 그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 ‘박성식이 하니까.’ 간단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둘은 서로 많이 기대고 믿었는지 모른다. (둘, 말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함께 음악 하던 이들의 인연은 군대로 이어졌다. 해군홍보단. 장씨가 다섯 기수 선임이다.

“친구가 후임으로 들어오면 좋죠. 근데 그게 박성식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부르면 대답도 안하지, ‘엎드려뻗쳐’해도 미동도 않지. 그냥 후임 전체에게 기합을 안 주기로 했어요. 의도치 않게 좋은 선임됐지 뭐.” (장)

“이놈이 어디 감히 기합을 주려고. 콱.” 박씨가 걸걸하게 한마디 걸친다.

가수 고 김현식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로 함께 활동하던 이들. 1989년 ‘빛과 소금’ 첫 앨범을 발표하며 그들만의 음악을 세상에 내보였다. 팀 이름 ‘빛과 소금’. 대중음악을 하는 크리스천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연예계라는 곳이 위험하잖아요. 언제 누가 코 베 갈지 모르고. 성경말씀으로 이름 정하면 축복받고 스스로 행동도 조심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박)

음악 및 방송활동을 하며 단 한번도 잊지 않은 철칙이 있다. 주일 방송 일정 ‘쿨’하게 포기하기.

“성수주일 하느라 망했어. 그치?” (장)

“그러니까 내가 그냥 하자고 했어 안했어!” (박)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들의 진심, 농(弄)에 가려지지 않았다.

50

나이, 벌써 이렇게 됐다. 음악하며, 공부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미스터박 미스터장 우리는 진실한 친구/목소린 달라도 대화는 아주 잘 통해/다툰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깊어지네/우리는 오래된 친구 하나밖에 없는 친구/진실한 마음 하나로 서로를 이해하네.’ (빛과 소금 4집 ‘오래된 친구’ 中)

크게 싸운 기억은 없다. 장씨는 사람이 살면서 싸우는 건 당연한 건데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했다. (이때 박씨의 나지막한 독백. “내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힘들지 않았을까….”)

“하나님 가르침, 사랑이잖아요. 용서와 이해가 없으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죠. 서로 아끼고 기도해주다보니 우정이 지속된 거겠죠. 감사해요.” (장)

그 감사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정규앨범을 낼 때마다 복음성가(CCM)을 한 곡씩 넣었고 94년엔 CCM 앨범을 냈다. 음악으로 영광을 돌리자는 뜻이었다.

“전자악기들 빼고 순수하게. 성악 하는 꾀꼬리 아내도 참여했죠. 부족했어요. 돈 안 들이고, 정성 안 들인 느낌이 들어 너무 죄송했죠.” (장)

50. 생각이 많아졌다. 노랫말, 함부로 쓸 수 없다. 말하자면 나잇값이 하고 싶어 졌다. 둘은 ‘좋은 선생’이 돼 그 값을 치르고 싶다고 했다.

“미국 버클리음대 유학 중 좋은 선생을 만났을 때 희열을 느낀 적이 있어요. 저 역시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죠.” (장)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 작곡이 달라지고 연주가 달라지는 걸 느낄 때. 가장 기쁜 때가 그 때라며 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빛과 소금은 오래 전부터 어떤 음악적 재료든 활용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이 세계를 이끄는 분야도 많아졌지만 대중음악은 아직 세계 수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듣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게 목표입니다.” (장)

그래서 연구하고 연주하고 고민하기를 반복한다. 세계적인 대중음악가가 우리 땅에서 나오기를 기도하고 바라면서 말이다.

20년 전, 앞서간다는 평가를 들었던 자신의 음악을 50대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쉰 즈음 또 하나의 꿈이다. 박씨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공부가 될 수 있는, 음악학교를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완벽한 교과서와 같은 곡, 앨범을 만들고 싶어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예술작품도 만들어내고요. 큰 소망입니다.”

이번엔 장씨가 코끝에 걸친 검은색 선글라스를 살짝 올리며 말을 쏜다. “50 되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20

조명이 켜졌다. 객석을 메운 관객들의 환호성. 지난 11일 서울 행당동 소월아트홀은 들썩였다. 데뷔 20주년 기념공연. ‘오래된 친구’는 신이 났다. 연주하는 몸짓에 흥겨움이 묻어났다.

“공연에서 여러분 만난 게 16년 만이네요. 잊지 않고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의 제목은 ‘Rebirth(재탄생).’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중년의 거장은 뛰어난 실력을 갈고 또 닦았다. 노장에 들어섰지만 음악을 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인, 교회음악과 대중음악을 섭렵한 두 대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교회음악을 위해 둘이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번 공연은 그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팀 이름처럼 되기 위해 아직도 할 게 많은 두 친구. 공연을 마친 뒤 끊이지 않는 객석의 박수소리에 화답하는 장씨의 얼굴은 유독 빛났고, 땀으로 온통 젖은 박씨의 옷에선 짠 내가 났다. 천상 빛과 소금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조국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