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美 대사관저의 불편한 立地
입력 2011-06-13 18:00
역사문화도시는 서울의 지향점이다. 부지런히 가꾸고 다듬어 조금씩 꼴을 갖추어 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외규장각도서를 광화문에서 근정전까지 이봉하며 기념행사를 치를 수 있는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다만 도시의 역사성을 조선의 궁궐문화에서만 찾는 것은 아쉽다. 조선 정도(定都)가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이루어졌지만 이후의 역사도 소중하기는 매한가지다.
서울에서 고궁 다음으로 역사성이 강한 곳은 어디일까. 나는 서슴없이 정동을 꼽는다. 근대 역사의 흔적이 이만큼 선명한 곳이 없다.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단단한 역사적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왕조의 영욕이 서린 덕수궁을 중심으로 열강들의 대사관이 즐비했고,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에서 보듯 개화의 최전선이었다. 영국 대사관과 성공회성당, 구세군본영을 묶으면 브리티시 타운이 된다.
지금 이 일대는 문화적 공간이기도 하다. 대법원 자리에 들어선 서울시립미술관은 해마다 굵직한 기획전을 치르며 입지를 굳히고 있고, 정동극장은 향기로운 전통공연으로 날마다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화여고 돌담은 자체로 문화재급이며, ‘광화문 연가’의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조각도 이 동네의 아이콘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깁이 ‘A Slow Walk through Jeong-Dong’(한림출판사)이라는 책을 영문으로 낸 것도 이런 가치에 주목했다고 본다.
서울 도심의 역사 경관 깨뜨려
이처럼 아름다운 공간에 딱 하나 부자연스러운 건물이 있으니 바로 미국 대사관저다. 입지도 그렇거니와 경비를 위해 경찰이 쫙 깔리는 것도 인문적 경관을 망가뜨린다. 대사관저가 도심의 섬처럼 외롭게 떠있다 보니 덕수궁과 주변의 연계성을 떨어뜨린다. 자연히 정동 답사의 방해꾼으로 전락하고 만다.
덕수궁 후문 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1883년 초대 푸트 공사가 부임해 민씨 일가의 집을 대거 사들여 조성했다. 당시 나라마다 자국의 건축 양식에 따라 공관을 짓는 경연을 벌였으나 미국은 기이하게도 한옥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976년 5월 건물을 신축, 직전 대사 필립 하비브의 이름을 따 ‘하비브 하우스’로 명명했다. 미국이 건물을 짓지 않은 데 대해 역사학자들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흡수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곧 철수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고마운 것은 하비브 하우스가 정동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서울 도성 내 외국인 거주 제한이 풀리면서 가장 먼저 정동에 입성한 나라가 미국이었고, 덕수궁에 바짝 붙은 자리에서 공관 업무를 보았으니 이 일대가 이나마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분명 고층빌딩으로 에워싸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비브 하우스가 도심의 역사공간과 녹지를 지킨 수호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위대한 임무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장소성을 고려한다면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이 지금의 대사관저 옆으로 오는 대신 서울시민의 뜻에 따라 용산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니 직주(直住)의 이점이 사라졌다. 한국의 정치 상황으로 미루어 청와대와 근접해야 할 일도 없다.
이에 비해 보안은 더욱 취약해질 것 같다. 인접한 경기여고 터에 덕수궁의 부속건물인 선원전이 들어서고 대사관저 담을 따라 아관파천길이 복원된다면 하비브 하우스는 사방이 외부에 노출된다. 그러니 대사관과 함께 용산으로 옮길 것을 권하는 것이다.
성김 대사 ‘우정의 공간’ 어떤가
신임 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된 한국계 성 김이 한국을 잘 안다면 이런 한국인의 마음도 헤아려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 미국 대사관저를 용산으로 이전하고 정동을 온전하게 돌려주는 것은 한국인에게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대신 하비브 하우스는 ‘한미 우정의 집’으로 꾸며 두 나라 사람들이 친교하는 장소로 쓰였으면 좋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