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주가 쓰시겠다 하라

입력 2011-06-13 17:52


누가복음 19장 28∼32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와 뭔가 다른 특별한 구석이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대단한 착각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어떠함이 아닌 주님의 위대함을 찾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위대했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팔아먹은 졸장부였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으로 다윗에게 적용할 수 있는 죄는 직무유기, 간음, 청부살인, 범죄은닉 등 법적 최고형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위대함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 중 위대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만 마른 막대기와 같은 나를 하나님이 붙잡아 주신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에게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의 고백이 날마다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죽은 개 같이 미천한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와 구원해 주시고 직임을 맡겨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이 땅의 권세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타신 어린 나귀는 주님의 소유도, 제자들의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이 나귀를 갖고 올 수 있을까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모든 염려하고 걱정하는 상황이 종료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이 내 인생을 쓰시기만 하면 인생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은 상관없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선물로 주신 3남매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둘째와 셋째는 어떤 환경에서도 빠르게 잘 적응합니다. 막내가 최근 엄마한테 고백하기를, 자기는 ‘사모’는 안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화려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얼마 전 TV에서 해병대 훈련 장면을 보고 군대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안 가도 된다고 했더니 그날 저녁부터 며칠 동안 이 땅에 통일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민족의 통일을 위해 제 아들보다 더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큰 아들입니다. 다른 아이보다 한참 늦게 걷더니 모든 것이 늦습니다. 수학과 과학이 무척 약합니다. 그런데 강함도 있습니다. 먹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처음 안동에 내려왔을 때 초등학교에서 첫 시험을 치렀는데 문제가 ‘소와 돼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쓰시오’였습니다. 아들의 답이 가관이었습니다. 공통점은 “둘 다 구워 먹으면 맛있다”이고, 차이점은 공란으로 비워두었습니다. 큰 아들은 앞으로 이 사회에 발 빠르게 적응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들의 인생에 주님이 전격적으로 개입하시면 쓰임 받는 위대한 인생이 될 거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배요한 안동 용상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