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22) 여성환경연대·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초록나무캠페인’
입력 2011-06-13 18:09
텃밭에 꿈을 심고 연극하며 용기 듬뿍
암 환자들 위한 ‘아낌없는’ 재능 기부
서울 목동 이화여대목동병원의 들어가는 길목 한 켠에는 자그마한 밭이 자리잡고 있다. 49.5㎡(15평) 가량 되는 땅에 6개의 네모난 구역이 만들어져 있고 각 구역에는 감자와 상추, 오이, 토마토, 가지 등 각종 밭 작물이 싱그러움을 뽐내며 자라고 있다. 도심 한폭판, 그것도 수많은 환자들이 드나드는 병원에 펼쳐진 시골 풍경에 많은 이들의 눈길이 와 닿는다. 자세히 보면 각 구역별로 ‘노란 밀밭과 참나리네 밭’ ‘좋은 친구와 마음’ ‘애니네 밭’ ‘수선화네 밭’ ‘빨강머리앤 예수사랑’ ‘뻐꾸기와 연자방아’란 이름이 붙은 푯말이 꽂혀 있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주말 가족 농장을 떠 올릴 법한 이곳은 다름 아닌 암 환자들이 가꾸어 가는 ‘희망 텃밭’이다. 유방암과 자궁경부암, 난소암 등 여성암 환자 10여명이 지난 4월부터 직접 호미질을 해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며 채소와 열매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힘든 암 투병 중에도 자신이 파종한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고 열매맺는 것을 보며 암 환자들은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완치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 곁에는 텃밭 교육 전문가 박영란(50)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도시인들에게 쉽지 않은 농작물 재배법을 꼼꼼히 지도해 줄 뿐 아니라 암 환자들이 자연과 소통을 통해 투병 의지와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쉽게 좌절하고 세상과 단절해 버리기 십상인 암 환자들. 이들의 상처받은 마음 치유를 돕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환경연대와 다국적제약사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초록나무 캠페인’을 통해서다.
올해 4월부터 몇몇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시작한 이 캠페인은 암 환자들을 위한 다양한 정서 치유 프로그램에 여러 영역 전문가들이 재능 기부자(프로보노)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초록나무는 힘든 투병 생활로 지친 암 환자들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초록빛 나무 그늘이 돼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텃밭 가꾸기 전문가 박영란씨를 비롯해 숲 치유전문가 이미애씨, 연극인 김갑수씨, 음악치료 전문가 조현씨 등 각계 전문가 20여명이 희망 텃밭, 연극 교실, 숲치유 여행, 노래 교실, 건강요리교실 등을 통해 암 환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도우미로 흔쾌히 나섰다.
기존에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회나 단발성 위로 공연 등이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체험형 정서 치유 프로그램에 재능 기부자들이 참여하는 형태는 색다른 시도여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2월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 중인 황경자(49)씨는 매주 목요일 진행되는 이화여대목동병원의 ‘희망 텃밭’ 초창기 멤버로, 지금껏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밭을 가꿔 오고 있다. 암에 걸리기 전처럼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란다.
황씨 등에게 텃밭 가꾸기 교육을 해 온 박영란씨는 “작은 이파리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희망을 가지려 다짐하는 환자들을 지켜보며 나 자신도 숙연해 질 때가 많다”며 웃었다. 암 환자들은 오는 17일 지난 두 달여간 정성들여 가꿔온 작물들을 거둬 직접 요리해 보는 ‘수확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마크로비오틱 요리 전문가 이와사키 유카(35)씨가 참여해 건강 요리에 대한 조언과 함께 조리 시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마크로비오틱은 음식의 고유한 에너지를 최대한 살리도록 식재료를 깎거나 버리지 않고 조리하는 것이다. 유카씨는 강동경희대병원과 강릉아산병원에서 암 환자들을 위한 요리 교실을 진행해 오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치료 중인 15명의 전이성 암 환자들은 지난 5월 중순 숲치유 전문가 이미애씨와 사진 작가 임종진씨, 명상 전문가 김윤미씨, 의료진 등과 함께 인근 신구대학식물원으로 ‘숲치유 여행’을 다녀왔다. 숲 속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고 숲길을 맨발로 걸으며 대지의 기운을 직접 느껴 봤다. 이미애(45)씨는 “암세포가 뼈로 전이돼 걷기 힘들지만 숲에서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티는 환자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자연과 함께 숨쉬며 한결 평온해진 마음을 갖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숲치유 여행동안 환자들에게 사진 촬영법을 가르쳐 준 임종진(44)씨도 “환자 자신이 찍은 사진에서 생명과 희망을 발견하고 작지만 힘이 되는 기쁨을 느꼈을 것”이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연극인 김갑수씨와 드라마치료 전문가 최철환씨, 연극배우 김혜진·이현수씨 등은 이화여대목동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암 환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연극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암 환자들은 드라마(역할극) 치료와 실제 연극 공연을 통해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긍정적인 정서를 체험할 수 있다. 전문가의 지도 아래 매주 수요일 연극 연습에 매진 해 온 암 환자들은 각각 오는 17일과 20일 병원 의료진과 가족, 지역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종 연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최철환(43)씨는 “드라마 치료나 연극 교실은 환자들이 투병 중 마음 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스스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다시 행복과 건강을 되찾으려는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환경연대와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는 이밖에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음악치료 전문가 조현씨가 참여하는 ‘암 환우를 위한 노래교실’을 최근 새로 시작했고, 오는 9∼10월 중 강릉아산병원에서 2차 숲치유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초록나무 캠페인의 총괄 간사를 맡은 이미애씨는 “아직 시작단계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암 환자들이 정서 치유에 얼마나 목말라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면서 “앞으로 좀더 다양한 재능 기부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고 더 많은 암 환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전국 주요 암 병동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