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란 詩 십자가 의미까지 읊었다… 신양섭 교수 발표문 통해 본 페르시아 문화 속 예수
입력 2011-06-13 17:49
이슬람국가 이란에서 2008년 9번째로 등재된 유네스코 등록문화재는 기독교 유적. 북부 마쿠의 유대 타대오(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순교지에 세운 기념교회였다. 이슬람국가를 대표하는 교회 유적이 상징하듯, 이란 역사에는 기독교 문화의 흔적이 많다. 특히 9∼15세기 페르시아 문학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한 기적, 십자가, 만찬, 당나귀 등 기독교적 비유와 상징이 풍성하다.
페르시아 고전문학의 1세대 연구자 신양섭(54) 한국외대 이란어과 교수가 지난 10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아시아문화예술학회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실크로드예술의 재조명 및 아시아예술의 연구사와 연구방법’에서 ‘페르시아 문학 속의 예수 이미지’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슬람 문화 황금기인 9∼15세기 대표 시인 35명의 작품 수백 편을 분석한 결과, 30명의 시인이 46편의 작품 65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했다. 시인의 86%가 한차례 이상 예수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슬람 문화 속에 넘쳐나는 예수의 이미지. 어찌된 일일까.
‘십자가 사건’을 인정한 이란 시인
이란 문학 속 예수의 잦은 등장은 이슬람 경전 코란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실존 인물로, 위대한 선지자로 추앙한다. 코란에는 ‘메시아’ ‘의로운 분’ ‘동정녀에게서 잉태된 분’ 등 예수에 대한 묘사가 무려 25차례나 등장한다. 지금도 이란에 가장 흔한 남자 이름 중 하나가 ‘이사(아랍어로 예수라는 뜻)’일만큼 예수는 친근한 인물이다. 하지만 코란의 영향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대목, 이슬람 교리와 어긋나는 묘사도 눈에 띈다. 14세기 서정시인 카가니가 대표적이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지자 예수가 살아서 승천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 속에 십자가가 등장한다는 건 이슬람 교리와 다른, 기독교적 영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품에서 198번이나 예수와 관련된 상징을 활용했던 카가니는 한 시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의미로 말했는가/위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라고 읊었다.
신앙 고백처럼 들리는 시도 있다. “그 분은 예수님이고 나는 그 분의 제자, 가까이 있는 분의 아름다움에 나의 생명을 바치었소/그 예수의 제자는 제 정신을 못 차리고 밤에는 장님이 되고 밤에는 까만 어둠을 찾아 헤매오” 신 교수는 “시를 읽다보면 겉으로만 이슬람교도였지 내면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의 묘사가 등장한다”고 말했다. 카가니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으로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의 기독교적 감성은 모계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페르시아의 대표적 서사시인 페르도시의 ‘샤나메(왕의 책이라는 뜻)’는 “당신의 보물 창고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로마의 황제가 너무도 기뻐했던 것을”이라고 노래했다. 야사(野史)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은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와 기독교를 국교로 한 비잔틴제국(330∼1453) 사이에 십자가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전한다. 시 속 ‘당신’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십자가를 탈취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가장 많이 인용한 시인은 265회나 예수를 직간접적으로 등장시킨 14세기 대표 시인 모울라비였다. 이슬람교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 사상가인 그는 터키에 거주하며 기독교 공동체와 교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제국의 소수자, 이란인과 기독교인
이란인과 기독교 공동체. 둘의 관계는 페르시아 문학 속 예수 이미지를 이해하는 또 다른 단초가 된다. 이란은 7세기 문자(팔라비 문자)와 종교(조로아스터교)를 모두 버렸다. 아랍의 침략으로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했을 때, 그들은 과거를 내던지고 적극적으로 이슬람문화를 흡수했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문화적 대변신이었다. 그러나 지배자의 종교인 이슬람으로 개종한다한들 피지배자의 정치적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같은 이슬람교도이되 페르시아인들은 아랍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페르시아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박해받지는 않았지만 차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슬람제국 내에서 비이슬람교도는 ‘마왈리 제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색실을 매야 했다. 색실은 곧 계급이었다. 지위, 계급을 뜻하는 영어 ‘랭크(rank)’의 어원은 색깔을 뜻하는 아랍어 ‘랑(rang)’에서 나왔다. 민족적 차별을 받은 페르시아인과 종교적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기독교인. 두 집단은 아랍제국 내에서 소수자였다. 피지배층이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양측의 교류는 활발했다.
페르시아 지역이 기독교의 동방 전파에 징검다리가 됐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초기 기독교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도를 탄압한 로마제국과 달리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파르티아 제국은 종교에 관대했다. 로마를 도망쳐 나온 많은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이 무렵 시작된 페르시아의 기독교적 전통은 당나라 때 기독교가 경교(景敎)의 형태로 중국까지 건너가는 데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실크로드로 전해진 기독교 문화의 씨는 당을 거쳐 신라에까지 전파됐다.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7∼8세기 돌십자가와 경주의 성모 마리아 소상(塑像). 모두 페르시아 속에서 보존되고 싹을 틔웠던 기독교의 흔적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