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 (103)

입력 2011-06-13 09:40

나도 오늘만큼은 ‘가난’하다.

덮어놓은 전화기가 딩~동 하면서 문자가 왔음을 알려 주었다.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늘 아침에 딴 물미역 한 상자를 택배로 보냈으니 바다 냄새나 맡아 보세요. 울릉도에서 장대원]

그는 우리교회의 식구가 아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는 다니느냐?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기독교보다는 불교에 더 호감을 갖고 산다. 그렇다고 ‘불교인’은 아니다. 그가 행여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정신이다.

우리 교회에는 나 말고 그를 아는 이들이 제법 많다. 그를 아는 정도를 지나 그를 좋아하고, 그의 삶을 흠모하거나 동경하는 이도 있다. 그와 잠깐이라도 같이 있어본 사람들은 그에게 반하고 만다. 뭐랄까, ‘가난한 행복’이 뭔지를 그를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곧잘 그를 ‘희랍인 조르바’라고 생각하는 때가 종종 있다.

그의 직장은 언론사였다. 아내도 있고 공부 잘 하는 아들과 딸도 있다. 종가집의 종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40이 조금 넘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퇴직금으로 받은 일체를 아내에게 던져놓고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동가숙서가식’ 하면서 산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그의 노동행위는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살아 있음으로 하는 생명행위로서의 노동이고, 많거나 적거나 감사함으로 받아, 적절하게(이 단어는 그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단어다)그리고 아낌없이 쓴다.

지난 번, 우리교회 교우들 몇몇과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도, 그는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처음 보는 이들을 환대해 주었다. 그가 사람 공경하는 것을 보면 ‘지나치지 않나?’ 싶을 만큼 진실과 사랑이 넘친다. 그러니 눈 많이 온 지난 겨울에 자발적으로 절간으로 들어가 한 겨울 내내 눈만 쓸었다는 이야기에 존경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저 눈 쓰는 일이 전부였으니 지난 겨울, 춘천에 내린 눈은 14번이란 걸 세고 있는 것이다. 그 ‘열넷’이라는 숫자는 그에게 축복이다.

그러다가 봄이 되자 그는 울릉도로 갔다. 지천으로 덮이는 산나물이며, 막 피어오르는 바다나물이 그리웠던 거고, 봄에는 산사에 눈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 바다에 들었던 모양이다. 문자를 받고 전화를 넣었더니 이거니 저거니 군말 없이 이런다. “3일 동안 명이 나물 밭을 맸더니 20만원이나 벌었네. 그래서 그만 바다와 놀았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눅6:20)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그대로 가난이다. 복이 있다는 그 ‘가난’은 삶의 형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다. 세상엔 많이 갖고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적게 갖고도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가 보낸 물미역을 기다리는 나도 오늘만큼은 ‘가난’하다. 그러므로 복이 있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