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 알아스와니 소설 ‘야쿠비얀 빌딩’… 이집트 시민혁명 예언 아랍작품 최고 인기
입력 2011-06-10 22:25
아랍문학 전공인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김능우(51) 교수는 2009년 1월 말, 이집트에서 열리는 카이로 국제도서전시회를 참관하던 중 마침 염두에 두고 있던 소설 ‘야쿠비얀 빌딩’ 번역 건을 추진하기로 한다. 운 좋게도 전시회장에서 독자들에게 서명을 해주는 작가 알라 알아스와니(54)를 만날 수 있었다. ‘야쿠비얀 빌딩’을 번역하고 싶다고 하자 알라는 밝은 표정으로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꼬박 2년에 걸쳐 번역을 마친 김 교수는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킨 것은 이 소설을 거의 번역할 무렵인 올 1월 중순 무라바크의 독재 제체에 신음하던 이집트에서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라며 “2011년 아랍 시민혁명의 예언서 같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라가 현대 아랍어의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를 즐겨 쓰는 바람에 번역에 애를 먹었으나 결과적으로 구어체가 이 소설의 친근성을 높임으로써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어떤 작가이며 21세기 들어 아랍어로 쓰인 소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야쿠비얀 빌딩(을유문화사)’은 어떤 소설인가.
카이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알라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지만 소설쓰기를 본업으로 삼지 말라는 작가 출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미국 시카고의 일리노이대학 치의대를 졸업하고 귀국, 카이로에서 치과를 개업한 의사 출신이다. 그러나 글에 대한 욕망은 끓어올라 1990년 첫 소설 ‘아삼 압둘 아티의 보고서’를 정부 산하 출판부인 도서청에 제출했으나 출간 거부를 당했다. 이어 97년에도 단편집 ‘지도자를 기다리는 자들의 모임’이 출간 거부당하자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통상 2년 정도 걸리는 이민 수속 기간 동안 소설 한편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2002년 장편 ‘야쿠비얀 빌딩’을 탈고한 후 ‘문학소식지’에 연재를 시작하자 아랍 세계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폭발적인 관심과 격려가 쏟아졌다. 소설은 2006년과 2007년 각각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데 이어 영어, 아탈리아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등 20여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2006년 한 해 동안만 16만부가 팔렸다.
알라는 올 1월, 카이로의 중심지 ‘마이단 알타흐리르(자유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민주혁명 시위대열에 서 있었다. 소설로써만 독재 정부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집트 국민들과 함께 ‘반독재’ ‘무라바크 퇴진’을 외친 행동하는 지식인이 알라다. 이 같은 사회참여와 체제 비판 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야쿠비얀 빌딩’이다.
카이로 시내에 자리 잡은 성(聖) 야곱의 이름을 딴 야쿠비얀 빌딩은 1934년 아르메니아 출신의 사업가가 투자해 지은 10층짜리 최고급 건물이다. 당시 정부 고위관리와 장관들, 부유한 상공인의 거처였던 그곳은 52년 군사혁명 후 군 장성과 장교 가족이 거주했지만 인구 증가와 도시화에 따라 건물 옥상엔 빈민들이 거주하는 작고 불결한 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던 가든 시티의 거리를 걷고 있다가 낯선 장면을 보게 되었다. 미국대사관 전용주차장을 마련하기 위해 낡은 집을 허무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집의 외벽이 제거되자 내 눈 앞에는 그 안의 방들이 드러났다. 그곳에 살던 사람은 이사 가면서 있던 물건을 전부 가져가지 않은 듯 했다. 절단된 건물 속에 드러난 그 낯선 장면을 보고 나는 한 건물에 관한 역사를 상상으로 엮어 소설을 써볼 작정을 했다.”(작가의 말)
소설 속 야쿠비얀 건물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그 안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닌 채 모두 한 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특히 옥상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이 그 아래층의 중산층이나 부유층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힘겹게 살아간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귀족층 노인이자 호색한인 자키 베 알두수키, 건물 문지기의 아들인 타하 알샤들리, 타하의 애인인 부사이나 알사이드, 자키 베의 사무실 집사인 아바스카룬과 말라크 형제, 신문사 편집장인 하팀 라쉬드, 이집트 부호에 속하는 핫즈 무함마드 앗잠….
작가는 이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성장 배경을 통해 이집트 사회의 치부와 부패 원인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자키 베다.
“어느 날 밤 자키 베는 술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뷰익 자동차에 여자 걸인을 태워 바흘라르 로 구역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직접 몸을 씻겨 주려 했을 때, 자키 베는 그녀가 하도 가난해 시멘트 포대로 만든 속옷을 입고 있음을 알았다. 자키 베는 아직도 애정과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녀가 ‘포틀랜드 시멘트-투라’라고 큰 글씨가 쓰인 속옷을 벗으며 당황해하던 모습을 기억한다.”(19쪽)
소설은 이슬람 테러 단체, 동성애 등 아랍 문학에서 금기시된 주제들을 과감하게 다루면서 국가를 사금고처럼 운영하는 권력자들 아래서 나날이 쇠퇴해 가는 이집트 사회의 실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아랍의 시민혁명을 이해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