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당신’ 출간 25년… 아직도 매년 5000여부 판매되는 국민시집

입력 2011-06-10 17:34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시대인 1985년 말, 실천문학사 편집자인 김사인 시인(현 동덕여대 교수)은 ‘분단시대’ 동인들의 공동 시집 ‘분단시대 판화시집’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당시 32살인 도종환 시인이 쓴 ‘접시꽃 당신’ ‘병실에서’ ‘암병동’ 등 5편이 눈길을 끌었다.

교사였던 도종환(사진)은 이 작품을 발표한 뒤 충북도교육청 장학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장학사는 ‘접시꽃 당신’의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에 나오는 ‘죽어가는 사람이 누군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1986년 초, 그는 두 살 난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을 청주에 남겨두고 옥천의 한 중학교로 좌천되었다. 시인은 옥천의 하숙방에서 홀로 기거하며 이미 고인이 된 아내를 떠올리는 시를 썼다.

김사인은 도종환을 수소문해 “시 원고가 더 있느냐”고 물었고, 도종환은 이들 시편을 포함, 모두 69편의 시 원고를 건네주었다. 도종환은 “엄혹한 현실에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거북하다”며 많이 망설였지만 결국 편집자의 종용에 못 이겨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시집은 대박을 쳤다.

밀리언셀러 ‘접시꽃 당신’이 올해로 출간 25주년을 맞아 특별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실천문학사에 따르면 ‘접시꽃 당신’은 지금까지 모두 4판을 찍었고, 표지 디자인 역시 4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었다. 초판 당시 2000원이던 정가는 그 사이에 4500원, 5000원, 6000원, 8000원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특별양장본 1만원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 인상되었다.

이 시집은 86∼96년에 걸쳐 1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고 이후 매년 평균 5000부 정도가 팔리고 있다. 시의 시대였던 80년대를 뒤로 하고 매년 시집 판매가 줄고 있는 추이를 ‘접시꽃 당신’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뉴스 뒤엔 ‘나쁜’ 뉴스가 있게 마련이다. 도종환 시인은 최근 한 지면에 “나야말로 슬픔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매스컴의 떠들썩함과 독자들의 반응과 베스트셀러가 되어가는 과정은 시골학교 선생인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대중성에 영합한 저급문학으로 평가절하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불우를 먹고 사는 생명체라는 말이 실감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도종환은 불우를 딛고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리고 ‘접시꽃 당신’을 쓸 때 청주에 남겨놓았던 어린 아들은 이제 장성하여 지난달 28일 혼례를 올리고 분가했으니, ‘접시꽃 당신’ 출간 25주년을 맞은 시인의 심정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해도 뒤늦게나마 축하 인사를 전한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