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자체 사정 파문] ‘대놓고 요구’ 줄었지만 ‘에둘러 요구’ 여전하다

입력 2011-06-10 00:57

대기업과 거래하는 납품업체 A사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들의 해외출장 경비를 매번 부담하고 있다. A사는 거래처에 항공료와 숙박비를 포함한 출장경비 일체를 제공하거나 경우에 따라 현지에서의 식사비와 교통비 등을 내주기도 한다. A사 관계자는 “거래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 대기업 직원들 해외출장 경비까지 대고 있다”고 말했다.

9일 업계 등에 따르면 이처럼 대기업이 납품업체로부터 접대, 향응 등을 받는 부정한 관행이 아직도 만연해 있다. 대놓고 돈을 요구하거나 뇌물을 주는 일은 많이 사라졌지만 에둘러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는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대기업 관계자들이 중소 납품업체로부터 저녁식사 접대를 받은 뒤 룸살롱으로 2, 3차까지 가거나 직급에 따라 많게는 수백만원씩 경조사비를 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대기업에 포장재를 납품하는 중소업체 B사는 지난 봄 거래하는 대기업의 체육대회 준비를 해야 했다. B사는 술을 포함한 각종 먹거리를 챙겨 대기업이 체육대회를 하는 곳에 보냈다. B사 관계자는 “거래처에서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면 그쪽에서 먼저 귀띔을 해 준다”며 “주요 거래처가 체육대회를 한다고 들었는데 모르는 척 넘어갈 납품업체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거래 계약을 맺을 때 대기업이 납품업체에 자사 제품 구입을 조건으로 내걸기도 한다.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제품이라도 대기업과의 거래 성사를 위해 받아들이는 납품업체들이 많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불공정한 거래 조건을 내걸거나 부정한 방법을 요구할 때는 ‘권고한다’거나 ‘선택사항’이라고 한다”면서 “하지만 납품업체 입장에서는 어떤 표현도 강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소 납품업체들이 대기업 직원들의 실적 올리기에 동원되기도 한다. 명절이나 연말에 대기업에서 만드는 제품이나 상품권 등을 반강제적으로 사게 하는 식이다. 불필요하거나 원치 않더라도 대기업 직원들의 부탁이다 보니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기업 임직원들이 명절이면 고가의 선물을 받는 관행도 여전하다. 대부분 대기업들이 내부 윤리규정을 만들어 명절에 납품업체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 하도록 하고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실정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비리가 섞이지 않고는 대기업과의 거래 자체가 불가능하던 때가 있었다”며 “요즘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하지만 그와 같은 관행이 완전히 뿌리 뽑히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지적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