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가 공산품이다?… 국립농업과학원 ‘식물공장’

입력 2011-06-09 18:18


“야, 미래에는 전화기로 얼굴 보면서 대화할 수 있대. 그리고 가지고 다니는 컴퓨터도 나올 거래.”

“웃긴다. 그럼 물도 사 먹는 시대가 오겠다. 하하하.”

198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써니’에서 두 여고생은 DJ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전화기 부여잡고 수다를 떤다. 이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처럼 소녀들은 웃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누구나 물을 사 먹고, 영상 통화를 하고,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들고 다닌다.

2011년 6월, 비슷한 상상을 해보자.

“야, 미래에는 공장에서 식물을 찍어낸대. 농부 대신 로봇이 농사지을 거래.”

“웃긴다. 그럼 햇빛이나 흙 없이도 상추를 만들겠다. 하하하.”

영화 ‘써니’와 달리 이건 상상이 아니라 벌써 현실로 다가와 있다. 지난 7일, 미래를 엿보러 ‘식물공장’을 찾았다. LED(발광다이오드) 조명 아래 놓인 스펀지 속 상추를 뽑아 입에 쏙 넣었다. 아작아작 씹어봤다. 맛? ‘상추 맛’이다.

하늘을 나는 상추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 86-1번지. 이곳에 미래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의 식물공장. 지구 온난화에 따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대안이라는, 그 문을 열었다.

우선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단다. 반도체 공장에나 있을 법한 에어샤워(Air Shower)실. 살균 작업을 위해 1㎡ 남짓한 그 방에 들어서자 ‘윙∼’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약 1분 지속됐다. 이 샤워실은 벽마저 미래적이다. 사방은 은빛이고, 엠보싱 화장지처럼 올록볼록하다.

세상을 구해야 하는 원더우먼도 아니건만 인류에 닥친 문제가 머리를 스친다. 이런 것이다. 미국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제럴드 넬슨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16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2050년에는 기온이 상승해 식량 생산성이 떨어진다. 2010부터 40년간 옥수수 가격은 42∼131%, 쌀은 11∼78%, 밀은 17∼67%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08년 11월 ‘기후변화 농업부문 영향 분석과 대응 전략’에서 이렇게 밝혔다. “과거 30년(1971∼2000년 평년치) 대비 평균 기온은 2020년 1.5도, 2050년 3도, 2080년 5도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시뮬레이션 결과 기온이 1, 2, 3도 상승하면 사과 재배 면적은 각각 14.8%, 33.3%, 44.4% 감소한다.” 한국은행도 지난달 보고서 ‘1970년대 국제 곡물가격 급등락의 원인과 시사점’에서 이렇게 예견했다. “2050년까지 인구 증가에 상응하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70% 증산이 필요하다.”

농경시대에서 산업시대로, 다시 정보시대로 진보했지만 여전히 인류는 식량 문제를 고민한다. 에어샤워실의 ‘윙∼’ 소리가 그쳤다. 미래학자라도 되는 양 코끝에 내려앉은 안경을 살짝 들어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해결책을 찾아 나서듯 에어샤워실 문을 당당히 열었다. 눈앞에 보인 건… 상추였다. 공중에 둥둥 뜬 상추.

자세히 봤다. 날아다니는 건 아니다. 상추가 자라는 재배홈통(전문 용어로 재배 베드라 한다) 1∼66번이 도르래에 매달린 채 위로, 아래로 돌아다녔다. 속도는 분당 0.5m. 공중에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수직으로 높이 선 주차 빌딩에서 자동차들이 각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공간을 절약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원격으로 식물의 위치를 조정하기 때문에 작업자가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재배할 필요가 없다. 품질 표준화도 가능하다. 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서 자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식물의 성장 속도가 달라지는데 재배 위치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모든 식물의 품질이 동일해진다.

1층 한켠에는 재배 자동화 시스템 라인이 놓여 있다. 흙을 덮은 뒤 씨를 뿌리고 발아한 식물을 옮겨심기까지의 과정이 한 라인에서 이뤄진다.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상품이 제조되는 것과 같다. 국립농업과학원은 자동 이식(移植) 로봇도 만들어 놓은 상태다.

혹자는 묻는다. 온도를 제어하는 유리온실, 흙 없이 물과 배양액만으로 재배하는 수경재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여기는 빛, 온도, 이산화탄소, 양분 등을 최적 조건으로 제어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자동화 생산라인이 구비된 ‘공장’이다.

LED로 만드는 비타민C

2, 3층에 올라갔다. 1층은 식물이 공중에 둥둥 뜬 채 상하로 움직이는 ‘수직형 식물공장’인 반면 2층과 3층은 식물이 좌우로 움직이는 ‘빌딩형 식물공장’이다.

2층은 보라색, 흰색 조명이 강렬했다. 자연광과 인공광을 함께 활용하는 1층과 달리 2, 3층은 오직 인공광(LED, 형광등)만 사용한다. 보라색 빛 아래 놓인 상추, 조금 기괴하다. LED 조명을 올려다봤다. 자세히 보니 보라색이 아니라 빨강과 파랑 LED 조명이 섞여 보랏빛을 띠는 것이다. 빨강과 파랑의 비율도 과학적이다. 식물이 광합성을 잘 하기 위한 최적 조건인 5대 1에 맞춰져 있다.

색색의 빛들은 고유의 역할이 있다. 적색광은 개화 시기, 청색광은 잎의 생성, 황색광은 병해충 저항성 증진에 영향을 미친다. 김유호(47) 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 연구관은 “태양광이 인공광보다 낫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갖는데 꼭 그렇진 않다. 식물, 동물마다 필요한 태양광 파장대가 다르다. 불필요한 적외선, 자외선은 빼고 광합성에 필요한 파장대만 맞춰 놓은 게 인공광”이라고 설명했다.

‘쏴악∼’ 김 연구관의 얘기가 끝나자 시원한 물소리가 2층을 흐른다. 배양액이 공급되는 소리다. 배양액은 3분간 공급되다 30분 쉬고, 다시 3분간 공급된다. TV 리모컨처럼 생긴 제어판을 누르면 이 과정도 조정이 가능하다.

플라스틱 재배홈통에서 상추 한 개를 뽑았다. 상추 뿌리는 흙이 아닌 스펀지에 박혀 있다. 굵은 뿌리에 잔뿌리가 송송 난 게 북슬북슬하다. 잎은 노지 상추보다 야들야들하다. 식물도 사람이랑 비슷한가? 시련과 부침을 겪을수록 사람은 강인해지는데, 여기 상추는 비바람을 맞지 않아서 그런지 부드럽다.

조명만 받은 상추, 영양이 부족하진 않을까? 필요 없는 걱정이란다. 이혜진(33·여) 연구원은 “비타민C는 광원을 조절해 노지 채소보다 3∼4배까지 증가시킬 수 있다. 항산화 기능이 있는 안토시안 색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재배 속도도 빠르다. 보통 상추 재배 기간은 60여일, 이곳은 45일이면 끝이다.

이날 식물공장의 온도는 20도, 습도는 60%였다. 친환경 에너지인 지열(地熱)을 이용해 냉난방을 하고, 습도는 가습 시스템이 조절한다. 빛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공급된다. 얘네들도 밤엔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조명을 끈다. 이 모든 상황은 1층 제어실 컴퓨터 모니터에 실시간 보고된다.

남극 세종기지에 들어선 식물공장

지난 3월 문을 연 이 식물공장은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396㎡에 불과하다. 이보다 훨씬 큰 대형 프로젝트도 국내외에서 추진되고 있다. 미국 케네디우주센터는 우주 및 극지에서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식물공장 관련 기술을 연구 중이다. 지난해 1월 남극 세종기지에는 컨테이너형 식물공장이 들어섰다. 길이 5.9m, 너비 2.4m 컨테이너에선 LED와 형광등을 이용해 매달 채소 10㎏을 생산한다. 혹한의 남극에서도 식물은 자란다.

상업 용도의 식물공장도 있다. 2009년 12월 문을 연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 인성테크. 이곳은 수입 엽채류인 ‘롤로’ 등을 한달 약 2000㎏ 생산 가능하다. KT도 인성테크와 협력을 시작했다. KT는 지난 3월 스마트폰을 이용해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 배양액을 조정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식물공장 연구가 가장 활발한 국가는 일본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일본 식물공장 시장은 95억엔(약 1284억원)이고 50여개 업체가 있다. 그해 일본 정부가 지급한 식물공장 관련 예산만 146억엔(약 1974억원)이나 된다. 샌드위치 가게에도 미니 식물공장이 들어섰다. 지난해 7월 개점한 도쿄 지요다구의 마루노우치 빌딩 지하에 있는 서브웨이 채소사랑점.

단점도 있다. 초기 투자비용이 많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3년 전 뉴욕타임스는 미국 뉴욕시의 노른자위 땅인 맨해튼에 30층짜리 ‘식물빌딩’이 건립돼 시민 5만여명에게 안정적인 가격으로 채소가 공급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땅값은 비쌌고 수익성은 낮았다. 1957년 인공광과 컨베이어벨트가 구비된 최초 식물공장인 덴마크의 크리스텐센 농장이 지어진 뒤 이제껏 본격적으로 연구에 불이 붙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다.

완전한 형태의 식물공장을 처음 제시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딕슨 데스포미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벌써 세계 땅의 80%는 농업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5%는 이미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식물공장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피폐해진 농경지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다음 세대를 위한 대안이다.”

아직까진 재밌는 상상의 공간, 조금 상용화된 개념이 ‘식물공장’이다. 그러나 미래엔 이런 대사가 등장하는 복고풍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미래에는 식물공장에서 로봇이 식물을 찍어낸대.” 이미 매일 아침 식물공장 채소를 사먹고 있다면, 관객들은 크게 웃을 것이다. 인간은 늘 새로운 상상을 하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왔다. ‘식물공장’도 그중 하나가 될지 한번 지켜보자.

수원=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