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6-09 18:53
독일 종교개혁의 전개과정(1) - ‘심판’ 보다 ‘사랑’의 하나님 이해
루터의 생애와 독일의 종교개혁 발전과정은 다음과 같다. 1483년 11월 10일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농부 한스 루터와 마가레타 루터의 아들로 출생했다. 1497∼1498년 마그데부르그에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들로부터 중세 수도원적 공동생활의 영성을 깊게 배웠다. 1498∼1501년 아이젠나하에서 공부하면서 프랜시스 교단의 영성을 배웠다. 1501∼1505년 그는 에르푸르트에서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틀 논리학, 아리스토틀 윤리학과 형이상학 등을 공부했다. 루터는 그곳에서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해 옥캄(William of Ockham)의 유명론(Nominalism)과 어거스틴 신학을 배웠다.
1505년 루터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석사학위(M.A.)를 끝낸 후 법학을 연구하려고 하였으나, 7월 2일 친구와 함께 스토테른하임 근처에서 벼락을 맞게 되자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다. 1505년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의 고민은 바로 영적인 관심,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 영적 진지성과 열정이 루터로 하여금 수도사가 되게 했다. 1507년 2월 27일 에르푸르트에서 신부로 안수 받았으며, 부사령관 비칼의 명령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스승이자 어거스틴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즈로부터 신학적 영적 지도를 받았다. 1509년 3월 성서신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후 피터 롬바르드의 조직신학 저서 ‘문장(Sentences)’을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1508∼1509년 스타우피즈의 도움으로 루터는 영적 문제를 신학적으로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규칙을 강화하고 재정비하는 일에 대표로 뽑혀 로마교황청에 가서 빌라도 법정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했으나 오히려 심한 절망에 빠졌다. 1511년 이후 스타우피즈에 의해 다시 비텐베르그로 재임명돼 계속 살다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됐다. 비텐베르그는 그의 삶의 중심지가 됐다.
또한 그의 종교개혁신학과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512년 10월 루터는 구약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동시에 성서주석학 강의를 맡는 교수가 됐다. 1513∼1515년 시편강해, 1515∼1516년 로마서강해, 1516∼1517년 갈라디아서 강해, 1517∼1518년 희브리서 강해를 통해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수많은 학생과 동료의 관심을 끌었다.
1515년경 회심을 체험하는 탑의 경험(turmerlebnis: tower experience)을 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명상하고 읽고 또 명상하고 읽는 가운데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됐다. 그 본문에서 거듭남을 체험하였고 천국의 문이 됐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대학교 성곽예배당 정문에 독일어가 아니라 어려운 라틴어로 95개조 항의문을 게시하면서 토론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독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삽시간에 번역돼 종교개혁의 운명에 빠져 들게 됐다.
김홍기 총장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