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과 칭송 한몸에 받는 모순덩어리 ‘팻 fat’

입력 2011-06-09 17:52


팻 fat/돈 쿨릭·앤 메넬리 엮음/소동

한우 마블링에만 비싼 지방이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지방은 이 사람 얼굴 속에 있다.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가 지난 6일(현지시간) 야심작 ‘아이클라우드’를 들고 나타났을 때 청중의 시선을 끈 건 3개월 만에 더 수척해진 잡스의 얼굴이었다. 애플 주가는 1%나 추락했다. 고작 1∼2g 지방의 실종에 31억 달러가 공중분해된 것이다. 영리한 투자자는 ‘기름기 빠진’ 잡스 얼굴에서 애플의 미래를 읽었다. 이제 눈치 챘는가. ‘아이클라우드’ 발표회장에서 지방을 읽어내는 능력은 곧 투자의 기술이었다.

기름, 지방, 뚱뚱하다로 번역되는 팻(fat). 수치심과 죄책감, 경멸과 부러움, 불안과 행복의 감정이 교차하는 모순덩어리 물질. 고도비만과 아사자가 공존하는 지구에서 지방은 정치 경제 문화와 인종 계급 성을 가로질러 세상을 분석하는 훌륭한 해부학 도구가 된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 먼저 지방을 독해해야 한다.

이 책 ‘팻’은 그 결과물이다. ‘물질, 음식, 상태, 언어, 미학이자 관능의 모체로서 팻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문화인류학자와 비만인권운동가의 에세이 14편이 실렸다. 여럿이 썼으니 잡다함은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서술방식 발언수위 모두 제각각인 글들은 흩어져 있되 어수선하지 않고, 진지하게 발랄해서 부제가 알려주듯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보고서로 훌륭하다.

하와이 원주민의 ‘스팸’(통조림 햄) 사랑, 섹시하고 순수한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 성행위 대신 식탐을 보여주는 뚱보 포르노, 스웨덴 10대의 살에 관한 대화까지, 책은 세계의 지방 순례기다.

안데스의 지방 도둑들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지역에는 지금도 하얀 몸의 살인마 피스타코에 관한 괴담이 떠돈다. 인디오들을 납치해 동굴에 매단 뒤 피스타코가 빼앗아 가는 건 돈도, 장기도, 피도 아닌 지방, 그것도 ‘불쾌한 농도의 백인 지방과 다른 강하고 진한 인디오 지방’이었다.

소문은 이런 식으로 퍼졌다. ‘군복을 입은 페루의 백인 피스타코 부대가 원주민 지방을 빼내 외채를 갚았다더라. 성직자들이 인디오 지방으로 교회 종을 칠하고 성상의 윤을 낸다더라.’ 인디오 지방으로 돌아가는 공장이나 비행기 엔진에 인디오 기름을 치는 백인 기계공 얘기도 있다. 최근에는 인디오 지방으로 화장품과 약을 만든다는 원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피스타코 괴담의 탄생 및 유통 구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스페인 정복자가 등장한 이래 남아메리카의 가난한 인디오들은 북미 부국의 원료 및 노동력 공급지이자 상품 판매시장으로, 백인 정복자의 인종차별과 학대의 대상으로 착취당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 북미 공장과 비행기는 실제 인디언 지방으로 돌아갔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고혈’을, 안데스식으로는 ‘지방’을 빨린 것이다.

성직자 피스타코가 등장한 데도 역사적 연원이 있다. 신대륙에 진출한 수도회는 인디오 노동력으로 양모와 각종 작물을 키워 돈을 벌었다. 노동자 확보를 위해 스페인 국왕에게 아예 인디오 사냥 허가서를 받은 수도회도 있었으니 성상에 바른 인디오 기름은 비유적 의미에서, 진실이었다.

필자 메리 와이즈맨텔은 피스타코 괴담을 “가장 빈곤한 주변부 농촌의 시각에서 본 세계 경제의 기이하게 뒤틀린 이미지”라고 했다. 명쾌한 정리다.

날씬한 여자들이 살쪘다고 하는 이유

문화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건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죽과 우유로 몸집을 키우는 소녀나 ‘튼 살 자국이 있는 허리’를 칭송한 노래 같은 니제르 이야기는 거식증에 걸릴 때까지 굶는 현대 서구의 여자들이 기이한 딱 그만큼만 신기할 뿐이다.

미의식이 다르다는 것보다 흥미로운 건 ‘이상적 몸매가 대중매체, 자본주의와 무관하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기준이 ‘다른’ 억압으로 나타나는 이유를 분석한 대목이다. 레베카 포페노는 “서양에서 이상적 몸매에 대한 기준 때문에 여자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이상 그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이상에 맞춰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회적 맥락과 관련 있다”고 통찰했다.

개인이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서구의 개인주의는 실패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지운다. 늘어진 뱃살을 보며 느끼는 죄책감의 정체는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서구에서도 지방이 늘 부정적으로만 해석되는 건 아니다. 지방 가운데도 이탈리아 토스카나산 ‘엑스트라 버진(특별처녀)’ 올리브유를 삼키는 건 기름 덩이를 먹는 게 아니다. 혈통이 조심스럽게 보존된 건강하고 신선한 자연을 먹는 행위로 해석된다.

재미있는 관찰 몇 가지. 혹시 뚱뚱한 여자는 ‘나 너무 살쪘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챘는지. 이런 말은 날씬한 여자들만 한다. 그게 대화의 불문율이다. 진짜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는 말은 금기가 된다. 기껏 저지방 우유를 선택한 뒤 커피 위에 다시 걸쭉한 휘핑크림을 얹어 마시는 사람. 절제와 탐닉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그들의 심리는 어떤가. 문화인류학자들의 해석이 책 속에 있다. 김명희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