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고 참여하라’ 93세 레지스탕스의 절규
입력 2011-06-09 17:52
분노하라/스테판 에셀/돌베개
책은 텍스트로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책을 쓴 이와 그가 통과한 과거, 서 있는 현재, 그걸 읽는 독자가 소통의 거미줄을 짤 때 책은 온전히 책이 된다. 책이 저자, 독자, 시대의 대화라는 걸 확인해볼 모범 사례가 이 책이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가 판매되며 프랑스를 흔든 93세 노(老)투사의 ‘분노하라’. 책은 출간 전부터 국내 언론과 명망가들로부터 “프랑스 지성의 절정”(신영복)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된 오늘날(중략) 내게 다가온 감격”(홍세화)으로 회자됐다. 분노할 일은 많으나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삶이 불러온 열띤 반응이다.
86쪽 분량의 소책자에서 프랑스어판 편집자 후기와 저자 인터뷰를 제외하면 본문은 고작 20여쪽. 1시간 연설문 분량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세기에 걸친 저자의 삶과 함께 읽으면 의미만은 결코 소략하지 않다. 그래서 독서는 저자에서 출발하는 게 마땅해보인다.
1917년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한 스테판 에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전직 외교관이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후배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전쟁 발발 후 1941년 런던으로 건너가 샤를르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한다. 1944년에는 파리에 잠입했다가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전염병으로 죽은 프랑스인 수감자의 신분을 훔쳐 간신히 살아난다. 그 후 두 차례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전쟁이 끝나고 외교관이 된 에셀은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 작성을 돕는다. 인권선언은 그에게 레지스탕스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었다.
책에서 에셀의 주장은 간명하다. 이민자를 차별하고 사회보장제의 근간을 흔드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우파 개혁에 대해 그는 “분노하라”고 주문한다. 눈앞에서 레지스탕스 투사들이 목숨 걸고 지킨 프랑스 민주주의의 원칙과 가치, 인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분노는 터뜨리고 파괴하는 ‘격분’이 아니라 관찰하고 참여하는 냉정한 감정을 말한다.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했다. 그건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자는 93세 노인인데 책의 목소리는 청년의 그것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에셀의 강연을 듣고 출판사가 책을 제의했다는데, 책을 읽으면 그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임희근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