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 형사들, 이러다 런웨이 설라
입력 2011-06-09 19:20
류근지(27)씨는 자칭 모델이다. 졸업작품 전시회 모델을 했고, 온라인 쇼핑몰 모델로도 일했다. 옷에 미쳐 쇼핑 중독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김대성(28)씨는 한정판 마니아다. 희귀한 옷과 액세서리를 사들인다. 손목에는 엄청 크고 반짝이는 러시아 스타일의 시계를 차고 다닌다. 박성호(38)씨는 지방 미술대전 특선에 올랐던 서양화과 미술학도 출신. 요즘도 가끔 그림을 그리는데 옷을 그린다. 의상 콘셉트가 떠오르면 연필부터 찾는단다. 이광섭(22)씨는 옷가게 마네킹만 보면 “저렇게 입은 여자, 예쁘겠다” 중얼거리는 사람이고, 김원효(30)씨는… 사실 옷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런 다섯 명의 개그맨이 요즘 옷을 소재로 사람들을 웃기고 있다.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꽃미남수사대’ 코너를 만들었다.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외모에만 신경 쓰는 형사들의 이야기. 지난달 31일 오후 9시, 서울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단체 쇼핑에 나선 이들을 만났다. 개그맨 5명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한바탕 웃다 끝날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 패션 얘기할 때면 진지해졌다.
꽃미남수사대의 시작은 김대성씨였다. 그가 이광섭씨에게 “옷 잘 입는 형사 어때요?” 하면서 개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둘이 형사, 류근지씨가 용의자, 김원효 박성호씨가 서장과 청장을 맡았다. 웃음 포인트는 이들이 입고 나오는 옷. “아니, 대한민국 형사는 언제까지 까만 바지에 까만 점퍼만 입어야 돼?” 하며 최대한 형사나 범인과 어울리지 않게, 계급이 높아질수록 파격적으로 입는다.
“저희가 그냥 막 입는 거 같지만 각자 콘셉트가 있어요. 대성씨는 귀엽고 깜찍하게, 광섭씨는 일본풍 중에도 일반인은 소화하기 힘든 것만 골라서, 몸매 좋은 근지씨는 몸의 선이 최대한 잘 드러나게, 원효씨는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의 경계선, 그리고 저는… 과감한 노출.”(박성호)
이 개그의 단점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다행히 KBS에서 의상비를 지원받지만.
“처음엔 소매점에서 비싸게 샀어요. 한 번에 30만∼40만원씩 썼어요. 이젠 노하우가 생겨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요. 더 싸죠. 오프라인 단골집도 몇 군데 뚫어 놔서, 깎아주시고. 쇼핑 잘 하려면 무조건 자주 가서 친해져야 돼요.”(류근지)
KBS 의상팀도 바빠졌다. 의류상가 돌아다니고, 인터넷 쇼핑몰 뒤져서 각자 ‘이번 주에 입을 옷’ 아이디어를 찾아내면 의상팀에 제작을 의뢰한다. 박성호씨와 김원효씨가 의뢰자다. “그런 건 도저히 못 만든다”며 거절당하는 횟수도 늘어나 직접 만들기도 한다.
형광펜 같은 옷, 은갈치가 생각나는 옷, 농약 분무기를 응용한 옷, 폭탄을 닮은 옷…. 이 중 은갈치 의상은 류근지씨가 원단을 떼다 직접 디자인하고 박음질까지 마무리한 ‘작품’이다.
패션개그의 원조를 꼽자면 개그콘서트에서 2006∼2007년 방송된 코너 ‘패션7080’일 것이다. ‘압구정동 패션’이라면서 주로 ‘내복’을 입고 나와 웃겼다.
“스타일로 보면 저희가 진일보하죠. 예전과 비교하면 요즘 패션은 장르가 훨씬 다양하잖아요. 정장 아니면 힙합 스타일 정도였던 시절과는 다르죠.”(이광섭)
“아무튼 의상이란 건 문화잖아요. 우리가 하려는 거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패션의 극한, 그 끝까지 한번 가보는 거예요.”(박성호)
“무대의상이란 무대의상은 다 찾아봐서 이젠 눈에 차는 옷이 없어요. 요즘은 내 머릿속에 있는 옷이 훨씬 화려하고 멋진데 만들 방법을 못 찾는 경우가 더 많죠. 예를 들면 깃을 1m쯤 세운 의상.”(김원효)
“꽃미남수사대를 브랜드로 내걸고 인터넷 쇼핑몰 개설할까도 생각해봤어요. 개그하기도 바빠서 일단 미루고 있죠.”(김대성)
패션에 관해 이런 얘기 하는 거, 웬만큼 자신 있지 않고는 쉽지 않을 텐데, 이 개그맨들은 참 거침없다. 이 사람들 정말 패션을 알고 하는 얘긴가? 꽃미남수사대를 즐겨 본다는 패션 디자이너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008년 런던패션위크에 참가했던 디자이너 스티브J(본명 정혁서·34)에게 이들의 패션에 대해 물었다.
“하하. 되게 웃기데요. 경찰 이미지, 딱딱한 공무원의 이미지를 패션으로 완전히 새롭게 바꿔버리잖아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봐도 매번 스토리가 있고, 솔직히 그건 엄청난 상상력이에요. 디자이너가 컬렉션 한 번 할 때만큼 에너지를 쏟는 게 보여요. 거기에 위트나 유머를 섞는 것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동시대적인 트렌드는 아니죠. 그래도 아이템 한두 개 정도, 특히 서장 역할 하는 분이 쓰는 빨강 안경 같은 건 패션쇼에서 충분히 쓸 수 있겠던데요.”
스티브J는 이들의 패션에서 장 폴 고티에(피에르 가르뎅의 보조 디자이너로 일하다 독립한 프랑스의 전위적 디자이너)의 옷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12회 방송을 준비하면서 직접 제작한 의상만 스무 벌이 넘는다는 이들, 인터뷰 말미에 제법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더 큰 무대를 원해요.”
정식 패션쇼의 런웨이에 서고 싶다는 것인데… 글쎄.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