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의 人 + 文] 관계의 건축술

입력 2011-06-09 18:05


대학에 갓 들어온 19살짜리 신입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는 일은 경륜이 높은 교수들에게도 절대로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관한 사유행위이다. 신입생 대상의 인문학 강의가 녹록지 않은 이유는 인문학을 설명해주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19세 청소년들에게는 인간이라는 주제부터가 전혀 매력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형 스마트폰이라면 또 몰라, 따분하게 ‘인간’이라니! 그 학부생들이 인간에 관심을 갖고 인문학 강의실을 찾기 시작하는 것은 그들이 대학에서 두 번의 여름과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난 다음 -- 그러니까 3학년이 될 무렵부터이다. 인문학에 대한 이런 관심의 발로는 학생들의 ‘지적 도약의 단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 강의는 결코 오락이 아니지만 학부 저학년 대상의 인문학 입문강의에서는 ‘충격효과’를 시도해야 할 때가 있다. 충격적 질문을 던지는 일은 그런 충격효과를 위한 방법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강의실 피피티 화면에 푸른빛의 유성이 둥실 떠 있다. 외계에서 본 지구다. 그리고 그 화면 하단으로 질문 하나가 천천히 떠오른다. “너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 학생들이 움칫한다. 그들의 눈에 충격의 그림자가 역연하다. “여러분이 대학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 질문을 만나기 위해서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평생 여러분은 그 질문과 대면해야 하고 그 질문에 스스로 응답해야 한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이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지구 바깥에서 본 지구를 우리 눈앞에 대령해서 이 푸른 유성을 객관화할 수 있게 한 것은 과학의 위대한 성취다. 그러나 그 유성을 보면서 ‘나는 왜 이 지구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문학이다.”

나는 왜 이 지구에 있는가? 정답이 없고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가 노망들 때까지 헤매어도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무용의 열정에 봉헌된 학문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무용해 보이는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대한 실용을 갖고 있다. 첫째, 정답이 없으므로 우리는 각자 그 질문에 응답할 방법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야 한다. 둘째, 그 질문이 없고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의 모색이 없을 때 우리네 삶은 의미, 가치, 목적을 확보할 길이 막막해진다. 영혼은 황량해지고 삶은 무의미의 늪에 빠진다. 빵과 의미는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빵이 삶의 바깥쪽을 버팅겨 낸다면 의미는 삶의 안쪽을 지키고 지탱한다. 삶이 무의미해질 때 사람들은 시들시들 병들고 미치고 자살한다. 이 세계로부터 의미가 빠져나갈 때일수록 인간은 제 손으로 의미를 만들고 삶에 의미를 공급해야 할 책임 앞에 놓인다. 이 의미공급 작업에 필요한 절대적 요청이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이 그 무용해 보이는 인문학적 질문의 ‘위대한 실용’이다.

나는 왜 여기 이 지구에 와 있는가? ‘나’는 먼 별나라에서 온 어린 왕자도 아니고 은하를 헤매다 온 길 잃은 방문자도 아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가?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람들 속에 있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 지상에 온 것은 아닌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한 세월 이 지상을 걷기 위해 온 것은 아닌가? “이 푸른 유성에서 나는 당신을 만났습니다”(시인 황지우의 한 구절)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닌가? 내가 당신을 만나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내가 나 아닌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그 관계 속에 사는 일이다.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 지구에 와 있다. 어떤 관계를 만드는가, 그 관계의 성질과 품질은 어떤 것인가 -- 이것이 나를 ‘나’이게 한다. 나는 나 혼자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 속에,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관계 덕분에 내가 된다. 그 관계를 떠나면 나는 무의미하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것이 인문학의 기본 질문이라면 어떤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안내함으로써 그 질문에 응답할 길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적 기초 훈련이 ‘관계의 건축술’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읊은 것은 시인 정현종이다. 나와 너, 나와 남 사이의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섬이 생겨나고 우정이라는 이름의 섬이 솟아난다. 그 관계로부터 존경과 신뢰와 행복의 섬도 만들어지고 증오와 배반, 적대와 배척이라는 섬도 생겨난다. ‘나’는 어떤 섬을 만들고 어떤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가?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나는 나일 수 있을까? 내가 건축하는 관계, 내가 만드는 섬은 나와 너 사이에, 나와 남들 사이에 내가 정성껏 피워 올리는 한 포기 신성한 꽃은 아닌가? 그 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다는 점에서 ‘신성’하다. 그 꽃은 무용지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그 관계의 꽃은 이 지상에서 내 존재를 의미 있는 것이게 하는 나의 최종적 사원, 나의 부처, 나의 예루살렘은 아닌가? 내가 그것을 멸시할 때 내가 가진 다른 모든 것, 나의 다른 모든 사업들은 마침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는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